유형기(柳瀅基, 1897-1989) 감리교 목사, 감독, 저술가.
【1897년】
- 1897년 11월 17일 평북 영변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 영변 숭덕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
- 1914년 평양 숭덕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 1916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7년】
- 1917년 숭실대학에 입학하였다.
【1918년】
- 3월 일본으로 유학가서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하였다.
【1920년】
- 1920년 아오야마학원 고등부를 졸업하였다.
【1921년】
-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23년】
- 6월 오하이오주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였다.
【1925년】
- 게렛신학교를 거쳐 1925년 보스턴대학교 신학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1926년】
- 1926년에는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활약, 그 기관지 《동광》을 발행했다.
【1927년】
- 하버드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마쳤다.
- 1927년 결혼과 함께 귀국하여 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간사로 취임하였고 이때부터 교단 커리큘럼과 교재준비 및 제공, 프로그램 작성 등 다방면에 걸친 종교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 류형기 목사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7년 8월 25일 결혼하였다. 신부는 신줄려(Julia), 한국 이름은 신형숙이었다. 1898년 12월 23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한 부인 신형숙은 1927년 김활란 씨보다 이화를 1년 먼저 졸업한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3.1운동에 연루되어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고 출감한 독립투사였다. 그 후 북경대학에 유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도미하여 웨슬리안대학을 마쳤으며 결혼한 그 해 류 목사와 함께 서울로 오게 되었다. [신준려는 소파 방정환이 한때 좋아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1928년】
- 1928년 9월 월간지 『신생(新生)』을 창간하여, 6년간 간행하면서 일제 식민지에서 고뇌하는 청년들에게 희망의 새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1929년】
- 1929년 월간 《사생》의 주간이었으며 장이욱ㆍ정인과ㆍ이대위ㆍ백영엽ㆍ주요한ㆍ김윤경 등과 함께 흥사단 회원으로도 크게 활동하였다.
【1931년】
- 하바드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감리교인물사전에서는 1927년에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1933년】
- 1930년 미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된 후 1933년 교육국 총무로 기독교 교육을 통한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 1933년 교육국 김준옥 총무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어 가자 그의 후임으로 교육국 총무에 취임하여 이때부터 교단 커리큘럼과 교재 준비 및 제공, 프로그램 작성 등 다방면에 걸친 종교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1934년】
-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단권 성경주석』을 출판했다. 『단권 성경주석』은 『아빙돈 성경주석』을 대본으로 교계 50여 명이 협력하여 번역하고 편집한 첫 학문적인 성경 주석서로 고등 비판에 입각한 복음주의적 자유주의 입장에 서 있었다.
【1939년】
- 일제강점기 말기에 감리교단이 정춘수를 필두로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했을 때 가담한 행적이 있다. 1939년 도쿄에서 조선과 일본의 감리교단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정춘수, 신흥우, 양주삼, 김영섭 등과 함께 전권위원으로 참석했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조선기독교연합회와 같은 단체에도 참여했다.
【1940년】
- 1940년 역시 정춘수가 이사장이 되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과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에서는 간부를 맡았다.
【1941년】
- 1941년 9월 정춘수 감독의 친일 감리교 혁신교단에 반대하여 목사직을 파면당했다.
- 감리교 혁신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파면을 당한 후 동대문부인병원 회계과장이 되어 아현동에서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문과과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도 연전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우마차조합에 취직하여 출퇴근을 하였는데 때때로 류 박사와 백낙준 박사가 전차에서 만났다.
【1942년】
- 1942년 일제에 구속되어 1943년 3월 유언비어의 죄로 징역 1년과 벌금 100원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 해방 이후 미군정청의 위임으로 ‘조선인쇄주식회사’의 관리인이 되었다. 『영한사전』, 『영어회화』, 기독교 서적 등을 출판했으며
【1948년】
- 웨슬리안신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감리교신학교 제9대 교장(1948-1953)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 1950년 6ㆍ25 사변으로 인하여 김유순 감독이 북으로 납치당하자 그해 11월 기감 총리원 운영위원장을 거쳐 1951년 감독으로 피선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피난민 구제사업과 교회복구사업에 전력투구하였고 감독추천기금으로 4백여 교회를 재건하였다.
【1951년】
- 1951년 보스턴대학교에서도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전쟁 피난민과 교회 재건을 위해 1951년 미국감리교회를 방문하여 12만 달러, 1952년 10만 6천 달러의 보조금을 받았다.
【1954년】
- 기독교세계봉사회(CWS)와 감리교해외구제위원회(MCOR)는 큰 도움을 주었는데, 1954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감리교회로부터 총 160만 달러의 원조를 받도록 했다.
【1955년】
-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도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 1958년 10월, 8년 동안의 감독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였다.
- 은퇴 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성서주해』(전4권)를 간행했으며, 미국 유니온신학대학,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연구했다.
【1987년】
- 1987년 『영한 신약전서』를 출판했다.
【1989년】
- 1989년 6월 28일 별세했다.
【2008년】
-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개신교 부문에 선정되었으나 보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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