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8세기~3세기] 로마-에트루리아 전쟁 : 천년 로마를 만든 끊임없는 투쟁
로마-에트루리아 전쟁(Roman–Etruscan Wars)은 고대 로마(Ancient Rome)가 왕정 시기부터 공화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에트루리아 문명(Etruscan civilization)과 벌인 일련의 복잡한 군사적 충돌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이 전쟁들은 약 8세기 전반부터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 수백 년에 걸쳐 간헐적으로 발생했으며, 단순한 영토 정복을 넘어 문화와 패권을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 북쪽에 위치한 선진 문명으로, 로마의 초기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결국 로마에 흡수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 로마-에트루리아 전쟁의 정의와 시대 구분 난제
이 전쟁들은 '에트루리아 전쟁(Etruscan Wars)' 또는 '에트루리아-로마 전쟁(Etruscan–Roman Wars)'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일하고 통일된 전쟁이라기보다는 수백 년에 걸쳐 로마와 개별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분리된 분쟁들의 총체였다. 역사가 아만다 그레이스 셀프(Amanda Grace Self, 생몰년 미상)는 로마의 에트루리아 전쟁이 "야만인이 거주하는 땅으로의 단순한 확장 과정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로마인들에게 "에트루리아인(Etruscan people)에 대한 계획적이고 통일된 전쟁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대신, "에트루리아의 도시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노력은 개별적인 요인들과 사건들의 배열에 대한 개별적인 반응이었다." 에트루리아인들 스스로도 "성장하는 로마의 힘에 맞서 대규모 전쟁에서 연합한 적이 없었다."
이 전쟁의 시작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전통적으로 기원전 509년 로마 왕정 전복 이후 로마가 에트루리아 타르퀴니우스 왕조(Tarquinii dynasty)를 축출하며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을 수립한 시점을 시작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기원전 483년에 로마가 베이(Veii)와 처음으로 전쟁을 벌인 시점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고대 로마 초기의 역사 기록이 매우 제한적이고, 리비우스(Livy)와 같은 주요 사료조차 사건 발생 수세기 후에 기록되었으며 신화적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종전 시점도 학자들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265년에서 264년 사이에 에트루리아에 대한 로마의 정복이 완료된 시점을 종점으로 본다. 코흔(Kohn, 2013)은 기원전 264년 볼시니이(Volsinii)의 함락을 종점으로 지적하며, 브라이스(Brice, 2014)는 기원전 273년 카이레(Caere)에 대한 로마의 정복을 실질적인 종점으로 보지만, 기원전 241년 팔레리이(Falerii)의 반란을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마가렛 생키(Margaret Sankey, 2002)는 기원전 509년부터 234년까지의 기간을 제시하며, 기원전 209년 메타우루스 계곡 전투(Battle of the Metaurus)에서 하스드루발(Hasdrubal)의 패배가 에트루리아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오랜 경쟁을 끝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전쟁들은 테베레 강(Tiber)을 사이에 두고 이웃한 로마와 에트루리아인들이 소금(salt) 교역과 강을 이용한 교역로 확보를 위한 자원 경쟁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소규모 습격으로 시작하여 양측 도시들의 공성전으로 이어지는 양상이었다.
2. 로마 왕정 시기의 에트루리아 전쟁
로마 왕정 시대는 로마가 라티움(Latium) 지역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가던 시기로, 이웃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과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2.1. 로물루스(Romulus) 시대의 피데나이(Fidenae)와 베이(Veii)와의 전쟁
로마의 초대 왕인 로물루스(Romulus, 기원전 753년경~716년경 재위) 시대에도 에트루리아 도시들과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피데나이인들은 미래의 위협이 될 로마를 제압하기 위해 로마 영토를 황폐화하기 시작했다. 로물루스는 이에 맞서 피데나이에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여 매복 작전을 펼쳤다. 그는 군대의 일부를 숨겨둔 후 나머지 병력으로 피데나이 성문까지 접근하여 에트루리아인들을 유인했다. 로마군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본 피데나이인들이 성문을 열고 추격하자, 매복해 있던 로마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피데나이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점령했다.
이후 피데나이인들과 혈연적 관계를 맺고 있던 베이인들은 피데나이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로마 영토를 침략했다. 로물루스와 로마군은 베이 성벽 밖에서 베이인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베이인들은 도시로 도주했다. 로마군은 당시 베이 시를 직접 공성할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 베이의 영토를 황폐화시켰다. 결국 베이인들은 평화를 요청했고, 자신들의 영토 일부를 로마에 넘겨주며 100년간의 조약을 체결했다.
리비우스(Livy, 기원전 59년~서기 17년)에 따르면,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us Hostilius, 기원전 672년경~640년경 재위) 시대에 피데나이가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로물루스의 승리 이후 로마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2.2.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시대의 피데나이와 베이와의 2차 전쟁
로마의 제3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로마의 군사적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구한 왕이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피데나이와 베이와의 두 번째 전쟁이 기록된다. 이 전쟁은 로마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2.3. 에트루리아계 왕들의 통치: 타르퀴니우스 가문
로마 왕정 후기에는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기원전 616년경~578년경 재위)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기원전 534년경~509년경 재위)와 같은 에트루리아계 왕들이 통치했다. 이들의 존재는 로마와 에트루리아 문명 간의 깊은 상호작용을 보여준다. 특히 프리스쿠스는 에트루리아의 발달된 건축 기술과 공학적 역량(클로아카 막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 등)을 로마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은 결국 왕정 폐지와 함께 에트루리아계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다.
3. 로마 공화정 초기의 에트루리아 전쟁 (기원전 5세기)
로마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 시기 로마는 라티움 지역의 패권을 확고히 하고, 점차 북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3.1. 베이와의 장기간 전쟁
베이는 로마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강력한 에트루리아 도시였다. 로마 공화정 초기, 베이와의 갈등은 로마에게 가장 큰 군사적 도전 중 하나였다.
- 제1차 베이 전쟁(기원전 483년-474년) :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 전쟁은 주로 약탈과 소규모 전투로 구성되었다. 초기에는 로마가 파비우스 가문의 군대에 힘입어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했지만, 기원전 479년에 베이 군의 매복 공격으로 파비우스 가문 전체가 전멸하는 카미시(Cremera) 전투에서 로마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후 로마는 베이와 40년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 제2차 베이 전쟁(기원전 437년-426년) : 피데나이가 다시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고 베이가 이를 지원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이 전쟁에서 로마의 독재관 마무스 아에밀리우스 마메르키누스(Mamercus Aemilius Mamercinus)가 베이를 상대로 승리했다.
- 제3차 베이 전쟁(기원전 406년-396년) : 로마는 베이를 상대로 10년간의 긴 공성전을 벌였다. 이는 로마군이 겨울에도 주둔하며 공성전을 수행한 첫 사례로, 군사적으로 큰 진전을 보여주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기원전 396년에 베이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이의 함락은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2. 팔레리이와 피데나이
베이의 몰락 이후, 베이의 옛 동맹이었던 팔레리이(Falerii)와 피데나이(Fidenae)는 로마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카밀루스는 베이 함락 이후 팔레리이로 진군하여 공성전을 벌였고, 팔레리이인들은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테베레 강 하류 유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확고해졌다.
4. 로마 공화정 중기와 후기의 에트루리아 전쟁(기원전 4세기-3세기)
로마는 점차 이탈리아반도 내의 패권을 확고히 해 나갔으며,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은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에 맞서 각개격파당하거나 서서히 흡수되었다.
4.1. 카이레와의 관계와 전쟁(기원전 353년)
카이레는 고대 에트루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로마와 오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라틴 학살 이후에 로마 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을 정도로 친로마적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세력이 너무 강력해지자, 카이레는 기원전 353년에 타르퀴니이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다. 이 전쟁에서 로마의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이울루스(C. Julius Iullus)는 카이레를 정복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카이레가 기원전 353년에 시비타스 시네 수프라기오(civitas sine suffragio), 즉 투표권이 없는 시민으로 편입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피정복민에게 부분적인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 체제에 통합하는 방식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지만, 1998년 오클리(Oakley)는 이러한 편입이 기원전 274/273년에나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4.2. 만지나티 움부라 전투(Battle of Sentinum)와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저항(기원전 295년)
기원전 3세기 초, 로마는 삼니움족(Samnites)과의 치열한 삼니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삼니움족, 갈리아인(Gauls), 움브리아인(Umbrians)과 연합하여 로마에 대항하려는 최후의 대규모 시도를 했다.
기원전 295년 만지나티 움부라 전투(Battle of Sentinum)에서 로마군은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로마가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절대적인 군사적 패권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패배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은 더 이상 대규모로 로마에 저항할 수 있는 역량을 잃었다.
4.3. 바디모 호수 전투(Battles of Lake Vadimo)
바디모 호수(Lake Vadimo)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인들 사이에서 거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중요한 장소였다. 기원전 310년과 283년에 이곳에서 로마와 에트루리아 간의 결정적인 전투가 두 차례 벌어졌고, 두 전투 모두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들은 에트루리아인들의 군사력이 로마에 비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4.4. 볼테라에 전투(Battle of Volterrae, 298 BC)
기원전 298년 로마와 에트루리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갈리아 동맹군을 매수하여 로마를 침공하려 했지만, 갈리아인들이 변심하면서 계획은 틀어졌다. 로마는 티투스 만리우스(Titus Manlius, 기원전 299년 집정관)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했으나, 만리우스는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Marcus Valerius Corvus)가 집정관으로 취임하여 에트루리아 영토를 황폐화시켰지만, 에트루리아인들은 전투를 거부했다. 이는 로마가 에트루리아 영토를 깊숙이 침공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 에트루리아 정복의 완료
수세기에 걸친 갈등 끝에 로마는 마침내 에트루리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265년에서 264년 사이에 에트루리아 정복은 사실상 완료되었다. 기원전 264년 볼시니이의 함락은 에트루리아의 마지막 주요 도시가 로마에 정복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의 도시들을 점령한 후 다양한 방식으로 이들을 통합했다. 일부 도시들은 로마의 동맹 도시가 되어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했지만, 많은 도시들이 로마의 '시비타스 시네 수프라기오(civitas sine suffragio)'나 완전한 시민권이 없는 형태로 편입되면서 로마의 지배 하에 놓였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점차 라틴어와 로마 문화를 받아들이며 로마 사회에 동화되었다.
6. 로마-에트루리아 전쟁의 의의와 유산
로마-에트루리아 전쟁은 로마가 작은 도시 국가에서 이탈리아반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련의 과정이었다.
- 군사적 역량 강화 :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로마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사 조직과 전술을 발전시켰다.
- 영토 확장 : 에트루리아 정복은 로마에게 이탈리아반도 중부와 북부의 비옥한 토지와 자원을 제공했으며, 이는 로마의 인구 증가와 경제적 번영의 기반이 되었다.
- 문화적 영향 : 비록 로마가 에트루리아를 정복했지만, 에트루리아 문명은 로마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점술, 건축, 상징물(파스케스, 원로원 의원들의 자주색 의상 등) 중 상당수가 에트루리아로부터 유래했다.
- 이탈리아 통합의 모델 : 로마는 에트루리아를 통치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도시들을 통합하고 통제하는 경험을 쌓았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반도 전체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 거대한 지중해 제국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로마-에트루리아 전쟁은 로마의 정체성이 군사적 정복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그 과정에서 로마는 단순한 도시 국가를 넘어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강력한 기틀을 마련했다. 비록 에트루리아 문명은 로마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로마의 유산 속에 깊이 새겨져 영원히 살아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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