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히지노(Pope Hyginus, AD.?~c.142) : 제9대 교황(AD.c.136~c.142)
- Pope Hyginus [Greek : Υγίνος]
- 출생 : 미상 / Athens, Achaia (Greece), Roman Empire
- 사망 : c.142 / Rome, Italy, Roman Empire
- 재위 : c.136~c.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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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교황 히지노의 조각상 |
교황 히지노(Pope Hyginus)는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초기 로마 교황 중 한 명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제9대 교황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략 기원후 136년/138년경부터 140년/142년경까지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재위 138-161년)의 치세 초기에 해당하며, 이는 초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점차 조직을 정비하고 교리적 순수성을 지켜나가던 중요한 시기였다. 히지노는 모든 초기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오늘날까지 공경받고 있다.
1. 히지노의 생애와 배경
히지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건강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교황 연대표(Liber Pontificalis)》에 따르면, 그는 아테네(Athens) 태생의 그리스인이었으며, 성직자가 되기 전에는 철학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당대의 사상적 흐름, 특히 그리스 철학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지적 배경은 그가 로마 교회의 수장으로서 복잡한 교리적 문제에 대처하고, 당시 맹위를 떨치던 영지주의(Gnosticism)와 같은 이단 사상에 맞서 논리를 전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히지노는 전임 교황 텔레스포로(Telesphorus)의 뒤를 이어 교황직에 올랐으며, 그의 후임은 교황 비오 1세(Pius I)이다. 교부 에우세비오(Eusebius, c.260년–c.339년)는 그의 저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서 히지노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통치 기간 첫해, 즉 138년 또는 139년에 텔레스포로의 뒤를 이어 착좌했다고 기록한다. 또한, 히지노의 교황 재위 기간을 4년 정도로 보았는데, 이는 《교황 연대표》에 기록된 136-140/142년과의 약간의 연대기적 차이를 보여준다. 초기 교황들의 정확한 재위 기간은 당시 기록 체계의 한계로 인해 종종 불확실성을 가진다.
2. 교황 재위 기간의 주요 업적 : 교회 조직화와 이단 논쟁
히지노의 교황 재위 기간은 로마 교회가 내부적으로 조직 체계를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다양한 이단 사상에 맞서 교리적 순수성을 지켜내기 위해 분투하던 중요한 시기였다.
1) 교회 계층과 특권의 제정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히지노는 성직자들의 각종 특권을 제정하고 교계제도(ecclesiastical hierarchy)를 설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로마 교회가 단순한 공동체를 넘어 체계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조치였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교회의 효율적인 운영과 신앙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도적 정비는 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계가 형성되는 데 초석이 되었다.
2) 영지주의와의 대결
히지노는 물질을 악으로 취급하는 영지주의에 맞서 싸운 최초의 교황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강력하고 복잡한 이단 사상 중 하나였으며, 기독교의 근본 교리,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y of Christ)과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교부 이레나이우스(Irenaeus, c.130년–c.202년)의 증언에 따르면, 유명한 영지주의자 발렌티누스(Valentinus)가 히지노 교황 시대에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아니체토(Pope Anicetus)가 선출될 때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또한 또 다른 영지주의자이자 마르키온(Marcion)의 스승인 케르도(Cerdon) 역시 히지노 시대에 로마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이단자들은 자신들이 이단에 빠졌음을 시인하고 종래의 주장을 철회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결국 다시 이단에 빠져 교회로부터 파문(excommunication)을 당하고 축출되었다고 기록된다. 히지노의 재위 기간에 이러한 이단과의 논쟁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러한 대결은 로마 교회가 자신의 정통 교리를 수립하고 확고히 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3. 순교 여부와 매장
히지노가 순교자로서 선종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전혀 확인된 바가 없다. 이는 초기 교황들 중 많은 이들이 순교 전승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역사적 증거가 부족한 경우와 유사하다. 당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격렬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오늘날까지 공경받고 있으며, 축일은 1월 11일이다.
히지노의 시신은 바티칸 언덕(Vatican Hill)에 있는 초대 교황 성 베드로(Saint Peter)의 무덤 인근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그가 베드로의 직접적인 계승자이자 로마 교회 내에서 높은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부분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바티칸 네크로폴리스(Vatican Necropolis)는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의 중요한 안식처였다.
4. 역사적 의의와 유산
교황 히지노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로마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철학자로서의 배경은 그가 이단 사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교리적 순수성을 지켜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성직자들의 특권을 제정하고 교계제도를 확립하려는 노력은 로마 교회가 단순한 신앙 공동체를 넘어 체계적이고 질서 잡힌 조직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후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권위와 통일성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히지노의 리더십은 초기 기독교가 다양한 사상과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교회가 어떻게 자신을 방어하고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로마 교회는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계승할 수 있었다. 히지노의 유산은 오늘날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견고함과 조직적 위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5. 결론 : 교리와 조직의 토대를 다진 초기 교황
교황 히지노는 초대 로마 교회의 제9대 교황으로서,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로서의 배경을 바탕으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 사상에 단호히 맞섰고, 교회 내에서 성직자 계층의 기틀을 마련하며 조직적인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비록 그의 순교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그의 이름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성인 공경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입증한다.
히지노는 사도 시대에서 벗어나 체계화되기 시작한 초기 기독교 시대에 로마 교회가 겪었던 성장통을 함께하며, 교리적 순수성과 조직적 견고함을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유산은 고대 로마 제국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발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하며, 수천 년에 걸친 가톨릭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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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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