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9일 화요일

미카엘 6세 브링가스(Michael VI Bringas, AD.?~c.1057) : 동로마 제국 제103대 황제(AD.1056~1057)

미카엘 6세 브링가스(Michael VI Bringas, AD.?~c.1057) : 동로마 제국 제103대 황제(AD.1056~1057)

 
  • 미카엘 6세 브링가스(Michael VI Bringas)
  • [Greek : Μιχαήλ Βρίγγας / romanized: Mikhaḗl Brîngas]
  • Stratiotikos [Greek : Στρατιωτικός, “the military one, the warlike”]
  • the Old [Greek : Υέρων, Geron]
  • 출생 : 미상
  • 사망 : 1057년 이후
  • 재위 : 1056831~ 1057830
  • 대관식 : 1056822
 
미카엘 치세 때의 금 테타르테론 주화
미카엘 치세 때의 금 테타르테론 주화
 

1. 미카엘 6세 브링가스 황제 : 미완의 문인 통치와 군인들의 반란

 
미카엘 6세 브링가스(Michael VI Bringas, 생몰년 미상1057년 이후)1056년부터 1057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그는 제국 행정부의 고위 관리이자 원로원의 일원이었으며, 황후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의 사망 후 황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짧은 통치는 끊임없는 내홍과 군사 귀족들의 반란으로 얼룩졌다. ‘스트라티오티코스(Stratiotikos)’라는 아이러니한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군사적 배경이 전혀 없는 문인 출신이었고, 이는 그의 통치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2. 문인 관리의 황위 계승 : 황후 테오도라의 선택

 
미카엘은 브링가스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유서 깊은 관리 가문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령의 원로원 의원이자 바실리우스 2(Basil II, 9581025) 시절의 환관 요한네스 브링가스(John Bringas)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오히려 그의 친척들은 미카엘 3(Michael III)의 섭정을 맡았던 요한네스 포르파나트로프와 관련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관료직에 몸담으며 재무부 고위직인 로고테테스 투 스트라티오티쿠(Logothetes tou Stratiotikou)’를 역임했고, 이는 그에게 스트라티오티코스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별명은 그의 행정적 능력과는 별개로, 그가 실제 군사 작전을 지휘하거나 군인 출신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055,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여제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는 후계자 없이 병에 걸려 사망할 위기에 처했다. 그녀의 고문들은 테오도라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도록 설득했고, 결국 그녀는 병상에서 미카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미카엘은 테오도라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인 1056831일 황제로 즉위했다. 이러한 방식의 즉위는 그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특히 군사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3. 문인 편애와 군인 차별 정책

 
미카엘 6세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이 속한 관료 계층을 편애하고 군사 귀족들을 홀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제국의 행정을 지탱하던 두 축, 즉 문인과 군인 계층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문인 출신인 자신을 황제로 추천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arios)와 처음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미카엘 6세는 재정 능력을 과시하며 막대한 예산을 풀었고, 총대주교와 원로원 고위층에게 큰 금액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958년 바실리우스 2(Basil II) 황제와 함께 공동 황제 자리에 앉았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군인 귀족들을 경멸했다.
 
1057년 부활절에 세 명의 장군 이사키오스 콤네노스(Isaac Komnenos, 10071061), 카타칼론 케카우메노스(Katakalon Kekaumenos), 바실 파르세누(Basil Parseinou)가 미카엘 황제에게 자신들의 월급과 군사 비용을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바실리우스 2세로부터 마케도니아의 모든 이단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 받은 군인 귀족이었다. 그러나 미카엘은 이들의 요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를 포함한 세 장군을 모욕하고 궁정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그는 장군들을 구걸하는 천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며 위협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분노했고, 결국 미카엘 6세에게 반기를 들 결심을 굳히게 된다.
 

4. 군인 귀족들의 반란과 전투

 
황제의 노골적인 군인 차별에 분노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Isaac Komnenos)와 그의 동료 장군들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아나톨리아(Anatolia)에 위치한 제국군 요새에 집결했고,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미카엘 6세는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는 노련한 장군 테오도로스(Theodoros)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30만 금에 달하는 보물을 미카엘 콤네노스(Michael Komnenos), 마노스 팔레이아스(Manos Paleias), 그리고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e Monomachos) 등의 주요 인물에게 주어 충성심을 확인하고 격려하려 했다.
 
그러나 1057820, 니케아(Nicaea)와 마그네시아(Magnesia) 사이, 마그네시아와 피치우스 산(Mount Phikios) 근처 페트로에(Petroe)에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의 반군과 황제의 군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황제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술적인 면에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의 군대가 황제군을 압도했고, 결국 황제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이 승리는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에게 황위를 주장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을 제공했다.
 

5.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의 개입과 폐위

 
페트로에 전투에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의 승리 소식이 콘스탄티노플에 전해지자, 수도는 혼란에 빠졌다. 시민들은 반군이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arios, 10001059)가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에게 황제의 즉위 요구를 포기하도록 설득했지만, 사실은 황제 미카엘 6세의 퇴위와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의 즉위를 종용했다.
 
총대주교 케룰라리오스는 강력한 정치적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고, 황제보다 교회의 권위를 우선시했다. 그는 미카엘 6세를 만나 그에게 퇴위를 종용했고, 1057830, 미카엘 6세는 총대주교의 압력과 군사 귀족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스스로 황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의 즉위 1주년도 채우지 못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는 비극을 맞았다.
 

6. 수도원 생활과 죽음

 
퇴위한 미카엘 6세는 곧바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의 말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황제에서 수도사로 전락한 삶을 살다가 사망했다. 짧은 기간 동안 황제였던 미카엘 6세는 결국 군인 출신 황제 이사키오스 콤네노스에게 제위를 넘겨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7. 미카엘 6세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미카엘 6세 브링가스의 짧은 재위는 비잔틴 제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한다. 그는 문인 계층이 황제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군인 계층과의 심각한 갈등이 제국의 안정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의 통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약화되고, 군인 귀족들과 문인 관료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던 11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반영한다. 그의 실패는 훗날 코메노스 왕조(Komnenian dynasty)의 강력한 군사 통치가 필요했음을 암시하는 선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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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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