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2년 라틴 학살(Massacre of the Latins) : 동서방 갈등의 비극적인 정점
1182년 4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에서는 서유럽 출신 가톨릭 교도들, 즉 ‘라틴인들(Latins)’에 대한 대규모 학살(Massacre of the Latins)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던 이탈리아계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 행위로, 동로마 제국의 동방 정교회 신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비록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지만, 이 비극적인 사건은 비잔티움 제국과 서유럽 라틴 세계 간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전환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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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 |
1. 라틴인들의 성장과 비잔티움 사회의 갈등
11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Venice), 제노바(Genoa), 피사(Pisa) 등 이탈리아의 해양 공화국들은 비잔티움 제국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은 제국의 수도 내에 자신들만의 거주 구역(Latin quarter)을 형성하고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특히 도시의 해상 무역과 금융 부문을 장악했다. 1180년경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약 6만 명에 달하는 라틴인들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그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라틴 상인들의 경제적 특권과 부는 비잔티움 상인들과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제국의 황제들은 서방과의 외교적, 경제적 관계 유지를 위해 라틴인들에게 특혜를 주었지만, 이는 곧 비잔티움 내부의 반(反) 라틴 정서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1171년 초, 베네치아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노바 거주 구역을 공격하고 크게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Manuel I Komnenos, 1118~1180)는 제국 내 모든 베네치아인들을 대규모로 체포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보복 조치를 단행했다. 대규모 강간과 방화도 동반되었다. 이후 베네치아 함대의 반격이 있었지만 비잔티움 군대의 압도적인 힘에 막혔고,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황제가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협상은 지연되었다. 베네치아 함대는 키오스(Chios)에서 겨울을 보냈지만, 전염병이 창궐하여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 마누엘 1세 콤네노스 [바로가기]
베네치아와 제국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갈등을 겪었고, 베네치아는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면서 세르비아 반란을 지원하고, 비잔티움의 마지막 이탈리아 거점인 안코나(Ancona)를 포위하며,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왕국(Kingdom of Sicily)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 관계는 1179년에야 점차 정상화되기 시작했으며, 1180년대 중반에야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제노바인들과 피사인들은 베네치아와의 분쟁을 틈타 큰 이득을 보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비잔티움 내부에 라틴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적개심을 심화시켰다.
2. 안드로니코스 1세의 부상과 반(反) 라틴 감정의 격화
1180년 마누엘 1세 콤네노스 황제가 사망한 후, 그의 미성년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Alexios II Komnenos, 1169~1183)의 섭정으로 라틴 공주 출신인 황후 마리아 안티오키아(Maria of Antioch, 1145~1182)가 나섰다. 마리아의 섭정은 라틴 상인들과 대귀족들에 대한 편애로 악명이 높았으며, 이는 제국 내부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참고] 알렉시오스 2세 콤네노스 [바로가기]
이러한 상황을 틈타 마누엘 1세의 사촌이자 야심가였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Andronikos I Komnenos, 1118~1185)가 1182년 4월 쿠데타를 일으키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입했다. 그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입성했고, 그의 등장은 비잔티움 내부에 억눌려 있던 반(反) 라틴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비록 개인적으로 특별한 반(反) 라틴 성향이 없었지만, 그는 시민들의 이러한 감정을 교묘하게 부추겼다. 황후와 유력자들(프로토세바스토스)이 라틴인들에게 도시 약탈 기회를 약속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대중의 분노를 라틴인들에게 돌렸다. 그의 등장은 사실상 라틴인들을 향한 대중의 폭력을 허용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3. 피로 물든 도시 : 학살의 현장
안드로니코스 1세의 입성 직후, 라틴 거주 구역에 들어선 비잔티움 폭도들은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무차별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학살은 사전에 많은 라틴인들이 사태를 예상하고 해상으로 도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여성과 아이들,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라틴 환자들까지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으며, 가옥, 교회, 자선 시설 등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특히 라틴 성직자들은 더욱 가혹한 표적이 되었다. 로마 교황 사절이었던 추기경 요한(Cardinal John)은 참수당했으며, 그의 머리는 개 꼬리에 매달려 거리로 끌려다니는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불확실하지만,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공동체는 약 6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살해당하거나 강제로 도시를 떠나야 했다. 특히 제노바와 피사의 공동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약 4,000명의 생존자들은 노예로 팔려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Sultanate of Rum)으로 보내졌다.
안드로니코스 1세 자신은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사실상 폭력이 무제한으로 자행되도록 방치했다. 이 학살은 황후 마리아가 가택 연금된 후 결국 처형당하기 전에 일어났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라틴인 중에는 이탈리아 출신 번역가이자 비잔티움 행정 관리였던 레오 투스쿠스(Leo Tuscus)도 있었다.
4. 제국과 서방 관계에 미친 치명적인 영향
1182년 라틴 학살은 비잔티움 제국의 서방에서의 평판을 더욱 악화시켰다. 비록 이후 비잔티움과 라틴 국가들 간에 정기적인 무역 협정이 곧 재개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한 근본적인 적대감은 오랫동안 남아 상호 간의 적개심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학살은 일련의 적대적 사건들로 이어졌다.
- 1185년 테살로니카 약탈 : 시칠리아의 윌리엄 2세(William II of Sicily, 1153~1189)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비잔티움 제국의 제2의 도시 테살로니카를 약탈했다. 이는 라틴 학살에 대한 부분적인 보복 성격도 있었다.
- 신성 로마 제국의 위협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Frederick Barbarossa, 1122~1190)와 하인리히 6세(Henry VI, Holy Roman Emperor, 1165~1197)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악화된 관계는 결국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Fourth Crusade)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무자비하게 약탈(Siege of Constantinople)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구적인 단절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흥미로운 점은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하고 분개하는 역사가들도 1182년 라틴 학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가 워렌 캐롤(Warren Carroll)도 지적한 바 있다.
5. 라틴 학살의 역사적 의의와 유산
1182년 라틴 학살은 단순한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었다. 이는 비잔티움 사회 내부에 뿌리 깊이 존재했던 서방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폭력적으로 분출된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는 서유럽 국가들에게 비잔티움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강화시키고, 향후 군사적 개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동서 기독교 세계 간의 관계가 이미 회복 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상업적, 정치적 이해관계와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상호 불신과 증오를 키웠고, 이는 십자군이라는 종교적 대의명분 아래서도 서방 세력이 동방 기독교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는 잔혹한 역사를 낳는 배경이 되었다. 1182년 라틴 학살은 천년 제국의 마지막 비극을 예고하는 불길한 전조이자, 중세 동서 관계의 분열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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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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