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II Palaiologos, AD.1370~1408) : 동로마 제국 제126대 황제(AD. 1390)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 혼란한 말기 비잔틴의 권력 다툼과 생존 (1370-1408)
- John VII Palaiologos / Palaeologus
- [Greek : Ἰ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 romanized : Iōánnēs Palaiológos]
- 출생 : 1370년
- 사망 : 1408년 9월 22일
- 부친 : Andronikos IV Palaiologos
- 모친 : Keratsa of Bulgaria
- 배우자 : Irene Gattilusio
- 자녀 : Andronikos V Palaiologos
- 재위 :
셀림브리아에 있던 비잔틴 황제 : 1385년 ~ 1403년
비잔틴 제국 황제 : 1390년 4월 14일 ~ 9월 17일
데살로니카에 있던 비잔틴 황제 : 1403년 ~ 1408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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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조나라스의 『역사 발췌집』 사본이 담긴 15세기 필사본에 수록된 요한네스 7세의 15세기 초상화 |
1. 서론 : 제국 쇠락기, 격변의 한가운데 선 황태자
14세기 후반 비잔틴 제국은 이미 쇠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태였다. 내부의 오랜 내전과 재정난, 그리고 동방에서 거대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발흥하면서 제국의 명운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 비잔틴 황실은 끝없는 권력 다툼과 분열로 점철되었는데,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II Palaiologos, 1370-1408)이다.
그는 비록 정식으로 장기 집권한 황제는 아니지만, 1390년 5개월간 짧게 제위에 오르고, 이후 삼촌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의 섭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심지어 독자적으로 테살로니키(Thessalonica)의 황제로 군림하는 등 복잡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인생은 끊임없는 황위 계승 싸움,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 그리고 제국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때로는 황제 찬탈자로, 때로는 제국의 충실한 수호자로 기록되며, 말기 비잔틴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권력 다툼, 오스만과의 관계, 그리고 제국에 미친 그의 영향력과 역사적 평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룰 것이다.
2. 초기 생애와 비극적인 황통 계승 (1370-1385)
1) 안드로니코스 4세의 아들로 태어나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는 1370년,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위 계승자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V Palaiologos, 1348-1385)와 불가리아 공주 케라차 오브 불가리아(Keratsa of Bulgari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아버지의 황위 계승권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불운한 삶을 살았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자신의 아버지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1332-1391)와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과 ‘쓰라린 싸움’으로 일생을 보냈다. 1373년, 안드로니코스 4세는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Murad I, 1326-1389)의 아들 사부치 베이(Savcı Bey)와 공모하여 각자의 아버지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실패했고, 무라트 1세는 요한네스 5세에게 자신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의 눈을 멀게 할 것을 요구했다. 요한네스 5세는 안드로니코스 4세의 눈에는 ‘가벼운 마취액’만 사용하고, 어린 손자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눈마저 멀게 하려 했으나, 다행히 요한네스 7세는 실명 위기를 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이후 안드로니코스 4세는 4년간 투옥되었다.
2) 공동 황제에서 계승권을 물려받기까지
1376년,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노아(Genoa)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요한네스 5세를 폐위시켰다. 1377년, 안드로니코스 4세는 스스로 황제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요한네스 7세도 ‘공동 황제’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4세의 재위는 3년도 채 되지 않았다. 1379년, 요한네스 5세와 마누일 2세가 탈출하여 오스만과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안드로니코스 4세를 다시 폐위시켰다.
하지만 요한네스 7세는 아버지의 반란과 황위 계승권을 계속 이어받았다. 1381년, 요한네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사이에는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요한네스 5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다시 ‘공동 황제’이자 ‘황위 계승자’로 인정했고, 안드로니코스 4세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셀림브리아(Selymbria)와 그 주변 지역을 ‘개인 영지’로 받았다. 이 합의로 요한네스 7세는 ‘황위 2순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셀림브리아에서 사망하자, 요한네스 7세는 아버지의 모든 황위 계승권을 상속받았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 요한네스 5세는 자신의 아들 마누일 2세를 후계자로 더 선호했다.
3. 첫 번째 제위와 몰락 : 찬탈과 혼란 (1390년)
1) 콘스탄티노플 점령과 짧은 통치
아버지의 황위 계승권을 물려받은 요한네스 7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황위를 노렸다. 그는 요한네스 5세와 마누일 2세에 대항하여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고, 1390년 4월 14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성공적으로 점령하여 황제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로 즉위했다. 그는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서 통치했다.
2) 권력을 잃다
그러나 그의 황제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으로 전락한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황위 계승 다툼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5개월 후인 1390년 9월 17일, 삼촌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오스만과 로도스의 성 요한 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의 도움을 받아 요한네스 7세를 폐위시키고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요한네스 7세는 다시 권력을 잃고 셀림브리아로 물러났다.
4. 마누일 2세와의 복잡한 관계 : 라이벌에서 협력자로 (1391-1399)
요한네스 7세와 마누일 2세 사이의 관계는 비잔틴 제국 말기의 불안정성과 내부 권력 다툼을 상징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황위를 노리는 라이벌이었지만, 동시에 오스만이라는 공통의 위협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협력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 재연되는 내전 위협 : 요한네스 7세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는 마누일 2세와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원인이 되었다. 수차례의 내전 위협과 잠재적인 충돌 가능성이 제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 권력 분담 합의 : 이러한 긴장 관계는 결국 1391년에 양측 간의 새로운 합의로 이어졌다. 이 합의에 따라 요한네스 7세는 ‘공동 황제’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마누일 2세 사후에는 ‘황위를 계승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화해를 의미했지만, 여전히 권력의 불안정한 균형 상태였다.
5. 콘스탄티노플 섭정 : 제국의 구원자 (1399-1402)
요한네스 7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자 그의 역사적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 시기는 바로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섭정(Regent)으로 활약했던 때이다.
1) 오스만의 콘스탄티노플 포위와 마누일 2세의 서방 원정
1394년,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Bayezid I, 1360경-1403)는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이 포위는 8년 동안 이어지는 장기전이었다. 제국의 미래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황제 마누일 2세는 서유럽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1399년에 직접 서방으로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3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럽 전역을 방문하며 도움을 구했다.
2) 요한네스 7세의 섭정 통치
마누일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면서, 그는 놀랍게도 자신의 라이벌이자 조카인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섭정 역할’을 맡겼다. 이는 마누일 2세의 현실적인 판단이자, 요한네스 7세의 충성심에 대한 마지막 신뢰를 보여주는 결정이었다.
요한네스 7세는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오스만 술탄과의 협력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혹’(allegations)에도 불구하고, 섭정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을 ‘충성스럽게 방어’(held the city loyally)했다. 그는 바예지트 1세의 끊임없는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수도를 끝까지 지켜냈다. 이 시기 콘스탄티노플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나, 요한네스 7세의 지휘 아래 굳건히 버텨냈다.
3) 앙카라 전투의 행운 (1402년)
콘스탄티노플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다름 아닌 동방에서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1402년, 중앙아시아의 정복자 티무르(Timur, 1336-1405)가 이끄는 티무르 제국(Timurid Empire) 군대가 앙카라 전투(Battle of Ankara)에서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defeat)했다. 이 전투에서 바예지트 1세는 포로로 잡혔고,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공위 시대’(Ottoman Interregnum)라는 심각한 내전기에 돌입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오스만의 압력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켰고, 비잔틴 제국에게는 천금 같은 휴식기를 제공했다.
6. 테살로니키의 황제 : 재건의 꿈 (1402-1408)
1) 유리한 평화 협상
앙카라 전투의 여파로 오스만 제국이 내분에 휩싸이자, 요한네스 7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쉴레이만 첼레비(Süleyman Çelebi, ?-1411)와 ‘유리한 조약’(favourable treaty)을 협상했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1387년 마누일 2세의 행동으로 오스만에게 상실했던 중요한 도시 ‘테살로니키’(Thessalonica)를 ‘제국의 통제 하에 되돌려 놓는 것’(returned to imperial control)이었다.
2) 마누일 2세와의 불화, 그리고 화해
1403년, 서방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마누일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충성스럽게 지킨 요한네스 7세를 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치욕적으로 내쫓았다’(sent him away in disgrace). 이로 인해 두 황제 간에는 다시 불화가 발생하여 ‘적대적인 관계’(enemies)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몇 달 후,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reconciled)했으며, 새로운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 합의에 따라 요한네스 7세는 테살로니키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황제의 완전한 칭호’(full imperial title)를 인정받았다.
3) 테살로니키의 황제로서의 통치
1403년부터 사망한 1408년까지, 요한네스 7세는 테살로니키에서 ‘모든 테살리아의 황제’(Emperor of All Thessaly)로서 ‘자신의 분리된 황실’(own separate imperial court)을 운영하며 독자적으로 통치했다. 그는 ‘능숙한 통치자’(able ruler)로 평가받았으며, ‘지역 교회 문제’를 처리하고 ‘도시의 방어 구조를 개선’하는 데 기여하여 ‘긍정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V Palaiologos, ?-1407)와 함께 공동 통치했으며, 아들은 1407년에 사망했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는 1408년 9월 22일, 38세의 나이로 테살로니키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혼란스러웠던 말기 비잔틴 제국의 한 시대를 마감했다.
7. 주요 등장인물
-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II Palaiologos, 1370-1408) : 본 글의 주인공. 비잔틴 황제이자 테살로니키의 황제.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V Palaiologos, 1348-1385) : 요한네스 7세의 아버지.
-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1332-1391) : 요한네스 7세의 할아버지.
-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 : 요한네스 7세의 삼촌이자 라이벌, 그리고 협력자.
- 바예지트 1세(Bayezid I, 1360경-1403) : 오스만 술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있던 위협적인 적.
- 쉴레이만 첼레비(Süleyman Çelebi, ?-1411) :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중 한 명. 요한네스 7세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 안드로니코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V Palaiologos, ?-1407) : 요한네스 7세의 아들이자 테살로니키의 공동 황제.
8. 역사적 의미와 평가 : 권력 다툼과 제국 수호의 복합적 유산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삶은 말기 비잔틴 제국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유산은 양면적이지만, 제국의 쇠락을 막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 내부 분열의 상징 : 그의 끊임없는 황위 계승 싸움과 삼촌 마누일 2세와의 갈등은 비잔틴 제국이 외부의 거대한 위협 앞에서 내부적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내부적 약점은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확장을 더욱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 콘스탄티노플의 수호자 : 그러나 그가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섭정으로서 바예지트 1세의 맹렬한 공세로부터 수도를 충성스럽게 지켜낸 공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 시기는 비잔틴 제국의 존망이 달린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었으며, 그의 굳건한 방어는 제국이 숨통을 트고 오스만 공위 시대의 행운을 잡을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테살로니키의 독립적 통치 : 테살로니키에서의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이 중앙집권적 권위를 상실하고 지역적인 통치자들이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치는 테살로니키 주민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은 그가 유능한 행정가였음을 시사한다.
- 실용주의적 외교 : 오스만 술탄과의 위협적인 동맹부터 쉴레이만 첼레비와의 유리한 평화 협상까지, 그는 제국의 생존을 위해 매우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이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비잔틴의 처절한 노력을 보여준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하는 동시에 제국의 위기 앞에서 중대한 책임을 수행했던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의 삶은 쇠락하는 제국의 마지막 장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과 생존을 위한 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비잔틴 제국을 최종적인 멸망에서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약은 제국의 명맥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는 데 기여했다.
9. 오늘의 상황에서 : 리더의 복합성과 위기 속에서의 선택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리더의 복합적인 역할과 위기 속에서의 선택이라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의 삶은 완벽하게 선하거나 악한 인물이 아니라,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고뇌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 첫째, ‘내부 분열과 공동의 위협’ 사이의 딜레마이다. 요한네스 7세와 마누일 2세는 서로를 황위 경쟁자로 보면서도, 오스만이라는 더 큰 위협 앞에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현대에도 국가나 조직이 내부의 갈등을 넘어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한 합의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둘째, ‘불운 속의 행운’ 그리고 ‘기회 포착’이다. 비잔틴 제국의 생존은 오스만 내부의 ‘앙카라 전투’와 같은 외부 요인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요한네스 7세는 이러한 불운 속의 행운을 놓치지 않고 유리한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는 등, 위기 속에서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 또한 중요함을 보여준다.
- 셋째, ‘권력 투쟁과 책임감’의 균형이다. 요한네스 7세는 분명 권력을 탐하는 인물이었으나, 콘스탄티노플 섭정이라는 막중한 책임 앞에서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는 리더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잊어서는 안 됨을 시사한다.
요한네스 7세 팔라이올로고스는 비록 비잔틴 제국을 최종적으로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고뇌와 분투는 멸망의 운명 앞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던 한 인간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의 이름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복합적이고 비극적인 인물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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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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