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19일 화요일

상(商, 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나라

상(商)(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개요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상나라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데, 기록에 의하면 전설상의 인물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국민을 잔혹하게 다룬 31대 주왕(紂王)이며, 주나라 시조인 서주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다루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창업 이전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로 되어 있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 차비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었기 때문에 낳은 아이로 되어 있다. 설은 순 때에 우의 치수를 도운 공적이 인정되어 순에 의해 상에 봉해져 자씨 성(子姓)을 받았다.

 

그 후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또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고 한다.

 

1.설(시조)

2.소명 - 계의 아들

3.상토 - 소명의 아들

4.창약 - 상토의 아들

5.조어 - 창약의 아이

6.명 - 조어의 아들

7.왕해(고조) - 명의 아들

8.왕긍 - 왕해의 동생

9.상갑미 - 왕해의 아들

10.보정 - 상갑미의 아들

11.보을 - 보정의 아들

12.보병 - 보을의 아들

13.주임 - 보병의 아들

14.주계 - 주임의 아들

15.탕 - 주계의 아들

 

역대 치세

 

  •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박(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를 수도로 삼고 있었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 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 상나라 4대 왕인 태갑은 폭군이었기 때문에 이윤에게 추방되었다. 후에 태갑이 반성했고 이윤은 이를 허락했다. 이후 태갑은 선정을 베풀어 태종(太宗)으로 칭해졌다.
  • 옹기 때에 왕조는 잠시 쇠약해졌다. 옹기의 다음 왕인 태무는 현인 이척을 임용해 선정을 베푸려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태무의 공적을 칭송해 태무는 중종(中宗)으로 칭해졌다.
  • 중종의 사후에 왕조는 다시 쇠약해졌다. 조을은 현인 무현을 임용해 선정을 하려고 노력했고 상 왕조는 부흥했다.
  • 조을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반경은 은허로 천도했고 탕 때의 선정을 부활시켰다.
  • 반경의 사후에 다시 왕조는 쇠약해졌다. 무정은 현인 부설을 임용해 상 왕조의 중흥을 완수했다. 무정의 공적을 칭송해 무정은 고종(高宗)으로 칭해졌다.
  • 고종 이후의 왕은 대체로 어리석은 폭군이었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신(주왕)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주의 무왕에게 주살되었다. 그리고 상 왕조는 어이없게 멸망했다.

 

멸망 후

 

주왕의 아들인 무경은 주의 무왕에 의해 상나라의 옛 땅에 봉해졌다. 무왕의 사후에 무경은 무왕의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해 주살당했다. 그 후, 무경의 백부의 미자계(주왕의 형)가 송에 봉해져 상 왕조의 제사를 계속했다.

 

상인(商人)라는 말은 상나라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한 후에 생업을 위해 각지를 떠돌아 다니며 물건을 팔았던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구체적으로 몇 년인지를 추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은 이 사건을 기원전 1046년의 일로 보고 있다.

 

예전의 설로는 죽서기년에 무왕에서 유왕(서주의 마지막 왕)까지 257년이는 기술이 있어 유왕이 죽은 것이 기원전 771년의 일이므로 상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1027년이 된다. 또 한서에는 주는 867년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술이 있어 이것으로부터 기원전 1123년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어, 상나라 멸망을 가장 오래 전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127년, 가장 나중으로 보는 것은 기원전 1018년이다.

 

갑골문자

 

1899년에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됨으로써 그 실존이 알려졌는데, '갑골'이란 거북의 뱃가죽뼈와 소의 어깨뼈를 말한다. 갑골문이란, 갑골의 안쪽 면에 불에 달군 나무를 눌러 급속히 팽창시키면 표면에 국부적인 균열이 생기는데, 그 균열의 상태를 보아 점을 치고 거기에 점친 날짜와 점쟁이의 이름, 점친 내용과 결과 등을 새겨 넣은 글을 말한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주로 조상신이나 자연신에 대한 제사의 여부, 전쟁의 가부, 농사의 풍흉, 바람과 비의 유무, 수렵이나 재해의 유무 등 왕의 통치와 관련된 다양한 사안들이었다.

 

정치

 

상나라 사람들은 상제(上帝, 여기서 상제는 하나님을 의미)라는 존재가 우주의 지배자이며 그 의지에 따라 모든 미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였다. 점을 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신정 정치가 이루어졌다. 갑골문은 상제의 의향을 묻기 위한 행위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상제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가 합쳐져서 상나라는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국가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나라 시기에 정교한 청동기가 발달되었는데 이러한 청동기는 바로 신정적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신정적 권위는 쇠퇴하고 세속적 권위를 강화해 간 왕권이 성장하였다.

 

행정

 

상나라는 읍제(邑制)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읍이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성벽을 갖춘 국가를 의미한다. 읍은 대읍과 족읍, 소읍으로 나뉘는데, 대읍은 상나라 왕이, 족읍은 상나라 왕과 연합관계에 있던 씨족의 우두머리, 소읍은 씨족의 우두머리와 연합관계에 있던 동족집단의 우두머리가 각각 통치하였다. 이 처럼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들 사이와 정치적 연합관계를 봉건(封建)관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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