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49~146] 제3차 포에니 전쟁 : 로마의 카르타고 말살과 지중해 패권의 완성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149년부터 146년까지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카르타고(Ancient Carthage) 사이에 벌어진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규모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제1차와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비해 군사적으로는 규모가 작고 기간도 짧았지만, 그 결과는 고대 세계사의 한 시대를 완전히 종결시켰다는 점에서 지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두 강대국 간의 숙명적인 대결은 결국 로마의 카르타고 완전 파괴로 귀결되었고, 이는 로마가 명실상부한 지중해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확장의 차원을 넘어, 로마가 과거의 적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복수심, 그리고 잠재적인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카르타고는 이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는 미약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는 명분 아래 완전한 말살을 택했다.
1. 전쟁의 배경 :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유산과 카르타고의 재기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뿌리는 제2차 포에니 전쟁(Second Punic War, 기원전 218-201년)의 여파에서 찾을 수 있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이끄는 카르타고가 로마 본토를 15년 가까이 유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의 활약으로 로마가 승리했다. 기원전 201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은 카르타고에 엄청나게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카르타고는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하고, 함대를 포기했으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가장 중요하게는, 로마의 허락 없이는 아프리카 내에서조차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놀라운 경제적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무역을 재개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심지어 예정보다 빨리 로마에게 전쟁 배상금을 완납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카르타고의 재기는 로마에게는 불안감과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로마의 고위 인사들은 카르타고가 다시금 로마의 패권에 도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이러한 로마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인물은 바로 카토 더 엘더(Cato the Elder, 기원전 234년-기원전 149년)였다. 그는 로마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마다 항상 "게다가,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Ceterum censeo Carthaginem esse delendam)"는 문구를 덧붙였다. 카토는 카르타고의 경제적 번영을 직접 목격한 후, 과거의 적이 재기하는 것에 대한 로마의 잠재적인 위협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이러한 지속적인 경고는 로마 원로원 내에서 카르타고에 대한 강경론이 힘을 얻는 배경이 되었다.
2. 누미디아 왕국의 도발과 카르타고의 자위권 상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는 누미디아 왕국(Numidia)의 왕 마시니사(Masinissa, 기원전 238년경-기원전 148년)를 카르타고의 감시견으로 이용했다. 마시니사는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조약의 맹점을 이용하여 카르타고의 영토를 끊임없이 침범하고 도발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번번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마시니사의 편을 들었다.
이러한 마시니사의 도발은 결국 카르타고가 스스로의 방위를 위해 로마의 허락 없이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는 마시니사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이 군사 행동은 대실패로 끝났고, 카르타고군은 완패를 당했다. 로마는 이 사건을 카르타고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맺은 평화 조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할 명분을 얻었다. 로마인들에게는 이 기회를 통해 오랫동안 품어왔던 카르타고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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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0년경 누미디아, 카르타고, 로마 영토의 대략적인 범위를 나타낸 지도 |
3. 전쟁의 시작과 로마의 가혹한 요구
로마는 카르타고의 조약 위반을 빌미로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돌입했다. 기원전 149년 여름,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Lucius Marcius Censorinus)와 마니우스 마닐리우스(Manius Manilius)가 이끄는 대규모 로마군이 아프리카의 우티카(Utica)에 상륙했다. 이 병력은 36,000에서 46,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막강한 군대였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와의 전쟁을 피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들은 평화 사절을 로마에 보내 협상을 시도했고, 로마 사절단이 아프리카에 도착하자 카르타고 시민들은 귀한 인질 300명을 로마에 넘기고 모든 전쟁 물품을 넘겨주는 등 온갖 굴종적인 요구를 수용했다. 카르타고 지도자들은 로마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그러나 로마의 의도는 평화가 아니었다. 로마 집정관들은 카르타고인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도시를 버리고 내륙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은 카르타고인들에게는 도시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르타고는 수백 년간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이자 그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도시였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요구는 카르타고인들에게는 저항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주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끈질긴 저항을 부수고 완전히 파괴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4. 카르타고 공성전 : 피비린내 나는 저항과 로마의 고전
로마의 가혹한 요구에 카르타고인들은 결사적인 저항을 시작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도시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무기를 생산했다. 여성들도 머리카락을 잘라 투석기의 끈을 만드는 등 시민 전체가 전쟁에 참여했다. 카르타고의 성벽은 매우 견고했으며, 로마군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1) 초기 로마의 고전과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활약:
초기 로마군의 공성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다. 기원전 149년 한 해 동안 로마군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반복적인 좌절을 겪었다. 카르타고 수비군은 사령관 하스드루발(Hasdrubal the Boetharch, 기원전 146년 전사)의 지휘 아래 완강하게 버텼다. 카르타고 방어선은 매우 견고했고, 로마군은 장기 포위전에서 많은 사상자를 냈다. 특히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nus)가 이끄는 로마군도 이듬해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했다.
이러던 중,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이자 양아들인 젊은 장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 기원전 185년-기원전 129년)가 로마군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여러 차례 위험한 작전에서 뛰어난 용맹과 지략을 보여주며 로마 병사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가 전쟁의 영웅으로 떠오르자, 기원전 147년 로마의 연례 선거에서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나이 제한 규정을 깨고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카르타고 공성전의 총지휘권을 부여받았다.
2)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의 지휘와 전략: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emilianus)는 카르타고에 도착하자마자 로마군 내부의 기강을 확립하고 효율적인 공성 작전을 수립했다. 그는 로마군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엄격한 훈련을 통해 군대의 전투력을 회복시켰다.
- 항구 봉쇄 : 스키피오는 우선 카르타고의 해상 보급선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카르타고의 항구 입구를 거대한 둑으로 막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작했다. 이 작업은 엄청난 난관에 부딪혔지만, 로마군은 불굴의 의지로 이 둑을 완성하여 카르타고의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었다.
- 새로운 항구와 전투 : 예상치 못하게 카르타고인들은 새로운 항구를 파서 봉쇄를 뚫고 나름의 선단을 조직하여 로마군에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로마군의 대응으로 이마저도 좌절되었고, 카르타고는 이제 육상과 해상 모두에서 고립되었다.
- 최종 돌격과 함락 : 보급이 끊기고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카르타고는 점차 지쳐갔다. 스키피오는 도시의 약점을 파악하고 최종 돌격을 감행했다. 기원전 146년 봄, 로마군은 마침내 카르타고 시내로 진입했다. 도시 내에서의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카르타고 시민들은 거리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집집마다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3) 끔찍한 파괴와 시민들의 운명:
6일 동안 이어진 시가전 끝에 카르타고는 완전히 함락되었다. 도시는 불태워지고 파괴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재기를 완전히 막기 위해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폐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약 5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카르타고라는 위대한 도시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농경지에 소금을 뿌려 다시는 작물이 자라지 못하게 했다고 하지만, 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로마의 극심한 복수심을 상징하는 전설로 여겨진다.
5. 전쟁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지중해 역사의 한 장을 닫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 카르타고의 완전한 소멸 : 서부 지중해의 가장 강력했던 해상 강국 중 하나인 카르타고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의 문화, 언어,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로마의 승리이자, 과거의 라이벌에 대한 완전한 복수였다.
- 로마의 지중해 패권 완성 :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지중해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패권자로 부상했다. 카르타고의 멸망은 로마의 상업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북아프리카 지역을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카르타고의 영토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Africa Proconsularis)'로 편입되어 로마의 곡물 생산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 그리스 세계의 몰락과 동일한 해 : 기원전 146년은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파괴된 해이자, 로마가 아카이아 동맹(Achaean League)을 최종적으로 격파하고 그리스를 속주로 편입시킨 해이다. 이는 로마가 서부와 동부 지중해 모두에서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강대국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로마 제국주의의 상징 :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제국주의적 성격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카르타고는 더 이상 로마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는 명분으로 완전한 파괴를 택했다. 이는 로마가 향후 정복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 사료의 한계와 후세의 해석 : 제3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정보는 주로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들 중 리비우스(Livy)의 기록처럼 사건 이후의 내용이 소실된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안(Appian)과 폴리비우스(Polybius)와 같은 역사가들의 기록은 이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에게는 오랜 적에 대한 완전한 승리였지만, 동시에 잔인하고 무자비한 로마 제국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역사이기도 하다. 카르타고의 폐허 위에서 로마는 더 넓은 제국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고, 지중해는 진정한 '로마인의 바다(Mare Nostrum)'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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