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8일 목요일

[고대 근동] 고대 아시리아 시대(기원전 약 2025년~기원전 1364년)

[고대 근동] 고대 아시리아 시대(기원전 약 2025~기원전 1364)

 
고대 아시리아 시대(Old Assyrian period, 기원전 약 2025~기원전 1364)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북부, 특히 티그리스강(Tigris River) 유역에 위치한 도시 아수르(Assur)를 중심으로 펼쳐진 아시리아 역사의 중요한 한 단계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아수르가 푸주르-아슈르 1(Puzur-Ashur I, 기원전 2025년경)에 의해 독립적인 도시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부터, 아슈르-우발리트 1(Ashur-uballit I, 재위 기원전 1363~1328)가 더 큰 영토 국가를 세우기 시작한 중기 아시리아 시대(Middle Assyrian period) 직전까지를 아우른다. 고대 아시리아 시대는 아시리아인들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지리정치학적으로는 수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동시에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한 역동적인 시기였다.
 
 

1. 도시 아수르의 태동과 독자적 정체성

 
아수르는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 북쪽에 자리하며, 인근 니네베(Nineveh)와 같은 오랜 도시들보다는 역사가 짧았지만 독자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초기 아시리아 시대(Early Assyrian period, 기원전 약 2600~기원전 2025)를 거쳐 푸주르-아슈르 1세 시대에 아수르가 독립적인 도시 국가로 거듭나면서 고대 아시리아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아수르는 대부분 소규모 도시 국가에 머물렀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셈족 언어인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 내에서 아시리아 방언을 발전시키고, 고유한 달력을 사용하는 등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아카드(Sumero-Akkadian) 문화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시리아 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아수르의 통치자들은 후대의 아시리아 왕들처럼 '샤르(šar, )'라는 칭호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쉬아크 아슈르(Išši'ak Aššur)'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아수르()의 총독' 또는 '아수르()의 대리자'라는 의미였다. 이는 아시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주신인 아수르를 도시의 진정한 통치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왕들은 도시의 행정을 담당하는 '알룸(Ālum, 도시 의회)'을 주재했는데, 이 의회는 아수르의 유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번영의 심장 :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의 구축

 
비록 정치적, 군사적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아수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중요한 경제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에리슘 1(Erishum I, 기원전 약 1974~기원전 1935) 시대부터 기원전 19세기 말까지, 아수르는 동쪽의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에서 서쪽의 아나톨리아(Anatolia) 중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였다.
 
아시리아 상인들은 이 무역 활동을 위해 아나톨리아 곳곳에 무역 식민지(kārum)를 건설했는데, 그중 퀼테페(Kültepe, 고대 명칭 카네시[Kanesh])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다. 퀼테페에서 발굴된 22천 점 이상의 쐐기 문자 점토판 기록은 당시 고대 아시리아의 문화, 언어, 사회, 그리고 상인들의 복잡한 일상과 상업 활동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기록들은 당시 아시리아의 경제적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3. 혼돈의 시대 : 외세의 지배와 왕조의 부침

 
고대 아시리아 시대는 끊임없는 지리정치학적 혼란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푸주르-아슈르 1세의 왕조는 기원전 1808년경, 아수르가 외부의 아모리인(Amorite) 정복자인 샴시-아다드 1(Shamshi-Adad I, 기원전 1808년경 사망)에게 점령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샴시-아다드 1세는 슈바트-엔릴(Shubat-Enlil)을 수도로 하는 단명한 북메소포타미아 왕국을 건설했지만, 그의 왕국은 기원전 1776년경 그의 사망과 함께 붕괴되었다.
 
샴시-아다드 1세의 사망 이후 중기 아시리아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은 기록이 매우 드물어 '암흑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 아수르와 주변 지역에서는 올드 바빌로니아 제국(Old Babylonian Empire), 마리(Mari), 에슈눈나(Eshnunna)와 같은 여러 국가들과 아수르를 장악하기 위한 다양한 아시리아 왕조 및 귀족들 간의 빈번한 충돌이 있었다. '암흑기'는 고대 아시리아 시대의 종점을 기원전 1765년 이쉬메-다간 1(Ishme-Dagan I, 기원전 약 1765년 사망)의 죽음으로 단축하여 보는 견해가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기원전 1776년경 단명했던 북메소포타미아 왕국의 대략적인 영역.
기원전 1776년경 단명했던 북메소포타미아 왕국의 대략적인 영역이 왕국은 아모리인 정복자 샴시-아다드 1세가 건설했으며그는 푸주르-아슈르 1세가 세운 원래 아시리아 왕조를 폐위시켰다.
 
고대 아시리아 시대 동안 아수르는 자주 외세의 통제나 종주권 아래에 놓였다. 예를 들어 기원전 18세기에는 샴시-아다드 1세의 지배를 받았고, 때로는 마리, 엘람, 바빌론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외세 지배는 기원전 1430년경부터 기원전 1360년까지 서쪽의 미탄니(Mitanni) 왕국의 속국이 된 것이었다.
 

4. 사회와 문화 : 퀼테페 점토판이 밝힌 진실

 
퀼테페 무역 식민지에서 발견된 방대한 양의 쐐기 문자 기록 덕분에 우리는 고대 아시리아 시대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다른 고대 근동 사회와 마찬가지로 고대 아시리아에서도 노예 제도가 존재했지만, 기록에 사용된 용어의 혼란 때문에 모든 '노예'가 실제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하인일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사회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역할과 책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거의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는 사실이다. 남녀 모두 재산을 상속하고, 유언을 남기고, 이혼 절차를 시작하며, 심지어 무역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다른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진보적인 모습이었다.
 
종교적으로는 아수르가 아시리아인들의 국가 신이자 주신으로 숭배되었다. 아수르 신은 도시 아수르 자체를 신격화한 인격신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수르 외에도 수메르의 날씨 신 엔릴(Enlil), 셈족의 날씨 신 아다드(Adad), 달의 신 신(Sin), 여신 이쉬타르(Ishtar) 등 다양한 신들이 숭배되었으며, 이들 신의 이름은 당시 사람들의 이름에 자주 포함되기도 했다. 순수 종교적인 텍스트는 드물지만, 신에 대한 숭배와 믿음이 사회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아시리아의 재건과 중기 아시리아 시대로의 전환

 
수많은 혼란과 외세의 지배 속에서도 아수르는 독립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기원전 1700년경 아다사이드(Adaside dynasty) 왕조 아래에서 독립 도시 국가의 지위를 되찾았으며, 미탄니의 속국이 되었던 시기에도 끊임없이 독립을 모색했다. 결국 기원전 14세기 초, 미탄니가 히타이트(Hittites)에게 연속적으로 패배하면서 아시리아는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이 독립은 아시리아가 일련의 강력한 전사 왕들 아래에서 소규모 도시 국가의 한계를 넘어 대규모 영토 국가로 전환하기 시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중기 아시리아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고대 아시리아 시대가 단순히 혼돈의 시기가 아니라 훗날 강대한 아시리아 제국을 위한 밑거름을 다진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시리아 시대의 경제적, 문화적 기반은 아시리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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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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