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드 포드, 선거 없이 올라간 백악관에서 명예를 얻기까지 [미국 제38대 대통령]
1. 예기치 않은 리더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상처를 보듬을 치유자가 필요하다. ‘예기치 않은 리더: 제럴드 포드와 국가의 치유’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이 기밀 아카이브는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헌법적 위기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인해 전임 대통령이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직후, 선거라는 일반적인 경로를 거치지 않고 백악관의 주인이 된 38대 대통령 제럴드 포드. “우리의 길고 끔찍한 국가적 악몽은 끝났습니다”라는 그의 취임 첫마디는 붕괴 직전의 미합중국을 향한 엄숙한 선언이었다. 이 표지는 정치적 야망 대신 오롯이 국가의 안위만을 생각해야 했던 한 성실한 의회주의자의 고독한 여정을 암묵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2. 단 한 번의 선거도 거치지 않은 백악관 입성
제럴드 포드의 백악관 입성은 미국 정치사에서 단 한 번도 전례가 없던 기이하고도 독특한 경로였다. 그는 대선 전당대회를 거치지도, 국민 투표의 뜨거운 승리를 경험하지도 못한 채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시작은 1973년 10월,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이 뇌물 수수 혐의로 전격 사임하면서 미합중국 헌법 제25조가 발동된 순간이었다. 닉슨 대통령은 당시 하원 소수당 원내대표로서 양당의 두터운 신망을 받던 포드를 새로운 부통령으로 지명했고, 의회는 압도적인 표차로 그를 인준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인 1974년 8월 9일, 워터게이트의 화염 속에서 닉슨마저 사임하자 부통령 포드는 자동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된다. “우리는 닉슨에게 포드 외에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라는 칼 알버트 전 하원의장의 말처럼, 그는 위기의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가 강제로 소환한 지도자였다.
3. 준비된 자질
예기치 않게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지만, 포드의 전 생애는 이미 준비된 지도자의 자질을 벼려내는 과정이었다. 1927년, 그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보이스카우트 최고 등급인 ‘이글 스카우트’를 획득하며 정직과 명예의 가치를 뼈에 새겼다. 미시간대 시절에는 불굴의 투지를 지닌 풋볼팀 MVP로 활약했는데, 패색이 짙은 경기에서도 끝까지 남아 싸우는 단단한 기질을 증명해 냈다. 그의 진면목은 1934년, 흑인 동료 선수 윌리스 워드의 출전을 인종 차별적 이유로 막아서려는 대학 측에 맞서 팀 탈퇴를 불사하고 항의했던 ‘원칙의 수호’ 순간에 빛을 발했다. 나아가 1944년 해군 장교로 참전했을 당시, 태풍 코브라의 공포 속에서 화염에 휩싸인 항공모함의 갑판 아래로 직접 내려가 화재 진압을 지휘했던 냉정함은 전후 백악관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재난을 극복할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다.
4. 의회주의자의 의회주의자
포드는 화려한 정치적 언변을 구사하는 선동가가 아닌, 묵묵히 법을 다듬고 갈등을 조율하는 ‘의회주의자의 의회주의자’였다. 그는 미시간주 5구 하원의원으로서 무려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의회를 지켰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957년부터 1968년까지 이어진 모든 주요 민권법과 투표권법에 100% 찬성표를 던지며 당파를 초월한 중도 실용주의 성향을 굳건히 유지했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조사한 ‘워런 위원회’의 핵심 위원이자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를 8년간 역임하는 동안, 그는 단 한 건의 주요 입법도 직접 발의하지 않았지만 완충자이자 조율사로서 양당의 무한한 신뢰를 얻었다. “국내 문제에서는 중도주의자, 외교에서는 국제주의자, 재정에서는 보수주의자”라는 그의 철학은 훗날 붕괴된 행정부를 재건할 가장 안전한 이정표가 된다.
5. 코드네임 : 패스파인더(The Crucible)
1974년 8월 9일, 백악관 이스트룸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불과 몇 시간 전 알렉산더 헤이그 비서실장으로부터 “모든 것이 급변할 수 있으니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는 긴급 호출을 받았던 부통령 포드가 마침내 신 앞과 국민 앞에 선 것이다. 닉슨의 하야 직후 거행된 이 권력 승계의 순간에, 포드는 화려한 수사 대신 가슴을 울리는 진솔한 고백을 던졌다. “나는 투표를 통해 여러분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저를 지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국가적 신뢰가 바닥을 치고 도덕적 정당성이 완전히 붕괴된 워터게이트의 참혹한 잿더미 위에서, 그렇게 코드네임 ‘패스파인더’의 위대한 첫걸음이 엄숙하게 시작되었다.
6. 결정적 역설 : 닉슨 사면의 저울
포드의 임기 중 가장 논쟁적이었던 순간이자 그의 정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결단은 1974년 9월 8일에 찾아왔다. 그는 전임 대통령 닉슨을 향해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사면을 발표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단기적으로 이 결정은 참혹한 대가를 불러왔다. 대중들은 사면의 대가로 대통령직을 넘겨받은 것이 아니냐며 ‘부패한 거래’ 프레임을 씌워 분노했고, 포드의 신뢰도는 폭락하여 1976년 대선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포드는 장기적인 국가적 이익만을 바라보았다. 닉슨에 대한 재판이 수년간 이어질 경우 국가가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마비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갑 속에는 “사면의 수용은 곧 유죄의 인정이다”라는 대법원 판례가 평생 간직되어 있었다. 역사는 결국 그의 고독한 희생을 재평가했고, 2001년 그는 국가 치유의 공로로 존 F. 케네디 ‘용기 있는 사람들’ 상을 수상하며 명예를 회복한다.
7. 격동의 895일(The Turbulence)
제럴드 포드가 백악관에 머문 기간은 고작 895일에 불과했으나, 그 나날들은 안팎으로 몰아치는 격동의 연속이었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12%까지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WIN’ 대국민 캠페인을 전개하고 감세 법안에 서명했다. 외교적으로는 베트남 패망과 사이공 함락의 비극 속에서 ‘오퍼레이션 프리퀀트 윈드’를 가동해 13만 명의 베트남 난민을 미국으로 전격 수용하는 인도주의적 결단을 내렸다. 1976년 돼지 독감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팬데믹 위기 앞에서는 직접 대국민 백신 접종 캠페인을 지휘하며 국민을 보호했다. 나아가 압도적인 민주당 다수 의회의 무분별한 과다 지출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 역사상 최고 비율의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하며 의회와의 외로운 전면전을 마다하지 않았다.
8. 데탕트와 현실주의
포드 행정부의 외교 무대는 데탕트의 평화적 비전과 냉혹한 현실주의 안보학이 교차하는 정교한 체스판이었다. 1975년, 그는 소련과 ‘헬싱키 협정’을 체결하여 냉전의 전 세계적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국제 인권 감시 기구의 위대한 틀을 마련했다. 중동에서는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양보를 압박하기 위해 6개월간 무기 금수 조치라는 피 말리는 신경전을 불사한 끝에 시나이 임시 평화 협정을 성사시켰다. 반면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가 미국의 상선 마야구에스호를 나포했을 때는 주저 없이 해병대를 투입하는 강경책으로 미국의 강력한 대응 의지를 아시아 전역에 각인시켰다. 물론 동남아시아 내 공산화 방지를 위해 인도네시아 정권의 동티모르 합병을 묵인하는 냉전의 어두운 그늘을 남기기도 했다.
9. 17일 간격의 두 번의 암살 시도
국가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직진하던 포드 대통령은 임기 중 불과 17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끔찍한 타격을 받았다. 첫 번째 위기는 1975년 9월 5일,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발생했다.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을 추종하던 리넷 프롬이 영거리에서 포드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으나, 경호 요원이 극적으로 총신을 잡아채며 제압에 성공했다. 이 충격이 가시기도 전인 9월 22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호텔 앞에서 사라 제인 무어가 그를 향해 리볼버 권총을 발사했다. 1차 시도 이후 도입된 ‘군중과의 거리 유지’ 원칙 덕분에 총탄은 포드의 머리를 불과 몇 피트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쏟아지는 불화살 속에서도 포드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대통령의 책무를 이어갔다.
10. 이데올로기 스펙트럼
제럴드 포드의 정치적 행보는 이념적 극단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오로지 상식과 통합만을 바라보는 온건한 중도주의의 표본이었다. 그는 1975년 대법관을 임명할 때 당파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법률적 역량만을 기준으로 존 폴 스티븐스를 발탁했는데, 그는 훗날 대법원 내 진보적 판결을 이끄는 거목이 된다. 또한 부인 베티 포드 여사와 함께 여성평등권 수정안(ERA)을 공개 지지하며 여성 평등의 날을 선포하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열린 마음은 퇴임 후인 2001년, 공화당 최고위급 인사 중 최초로 동성 커플의 동등한 대우와 고용 차별 금지를 지지하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당내 강경 보수파들의 격렬한 마찰과 반발 속에서도 그는 늘 시대의 상식 편에 서고자 노력했다.
11. 1976년 대선
1976년, 자신의 힘으로 온전한 임기를 시작하려던 포드 대통령에게 치명적인 미디어의 덫이 찾아왔다. 대선 레이스 초반부터 공화당 내 강경 보수파의 거두 로널드 레이건이 그의 데탕트 외교를 맹비난하며 거세게 경선에서 도전해 왔다. 가까스로 후보 지명은 따냈으나 대중 매체들은 SNL 등에서 그의 사소한 신체적 실수를 끊임없이 조롱하며 ‘우둔한 대통령’ 프레임을 씌워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한 TV 대선 토론회에서 치명적인 무대의 참사가 발생했다. 그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는 없으며, 포드 행정부 하에서는 결코 없을 것이다”라는 의도와 다르게 와전된 말실수를 저질렀고, 이는 민심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지미 카터에게 아쉬운 패배를 당하며, 미국 역사상 ‘선거 승리를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서글픈 기록을 남기게 된다.
12. 권력을 잃고, 명예를 얻다
권력의 무대에서 패배하여 물러났지만, 포드가 남긴 유산은 그 어떤 승리자보다 찬란하고 위대했다. 그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입성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취임사의 첫 구절을 전임자를 향한 헌사로 시작했다. “저 자신과 우리 국가를 대표하여, 우리의 땅을 치유하기 위해 앞선 대통령께서 하신 모든 일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인사를 기점으로 두 정치적 라이벌은 평생의 절친한 친구가 되는 기적을 낳았다. 포드의 닉슨 사면은 그의 정치적 영달을 완벽히 끊어버렸지만, 미합중국이 헌정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낸 위대한 방파제였다. 그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기꺼이 제단에 바쳐 국가의 안위를 구출해 낸, 미국 역사상 가장 민주주의적인 희생을 보여준 지도자였다.
13. 제38대 미국 대통령
가장 정당성 없는 방식으로 권력의 최정상에 도달했으나, 그 누구보다 헌법의 원칙을 충실히 수행하고 떠난 인간 제럴드 포드. 2006년 그가 눈을 감았을 때, 미국의 역사는 그를 향해 깊은 경의를 표했다. 그는 당대의 화려한 찬사나 인기를 탐하지 않았고, 오직 상처 입은 조국의 토양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기꺼이 대가로 지불했다. 이념의 폭화 속에서 중심을 잡고, 분열의 장벽을 허물며 위대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온몸으로 증명해 냈던 38대 미국 대통령. 그의 굳건하고 성실했던 발자취를 담은 기밀 아카이브의 거대한 파일이, 이제 미국의 안녕과 평화 속에 엄숙히 봉인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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