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인도주의자 혹은 불운한 대통령, 허버트 후버 [미국 제31대 대통령]
[1] 허버트 후버 : 위대한 구호가인가, 실패한 대통령인가
역사는 종종 한 인간을 단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곤 한다. 허버트 후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인 그에게 붙은 낙인은 바로 ‘실패자’다. 자본주의의 심장이 멈춰 섰던 대공황의 초입에서 미국을 이끌었던 그는 무능하고 차가운 지도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가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 쌓아 올린 명성은 역설적이게도 ‘위대한 구호가’이자 ‘인류의 구원자’였다. 고아로 태어나 전 세계적인 영웅의 반열에 올랐으나, 생애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깊은 추락을 경험한 인물이다. 번영의 정점에서 터져버린 대공황의 폭풍 속에 침몰해 간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는, 단순히 한 정치인의 성패를 넘어 시대의 거대한 파도 앞에 마주 선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위대한 인도주의자인 동시에 가장 불운했던 대통령, 우리가 몰랐던 허버트 후버의 진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
[2] 고아에서 자수성가한 광산 엔지니어로
허버트 후버의 출발점은 아메리칸드림의 가장 완벽한 표본이었다. 1874년 아이오와주의 작은 퀘이커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고아가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의지할 곳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새로 개교한 스탠퍼드 대학교의 첫해 입학생으로 당당히 입학하여 지질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전 세계를 무대로 뛰는 광산 엔지니어의 길을 걸었다. 호주의 거친 아웃백 흙먼지 속에서, 그리고 격변기 중국의 광산지대에서 그는 탁월한 능력과 초인적인 작업량을 선보였다. 가는 곳마다 무너져 가던 광산을 살려내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 후버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전 세계가 주목하는 전설적인 엔지니어가 되었으며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밑바닥 고아에서 시작해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기적 같은 자수성가 신화의 서막이었다.
[3] 전 세계를 굶주림에서 구한 ‘음식 독재자’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울리자 후버의 재능은 인류를 구하는 데 쓰이기 시작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식량 보급선이 끊겨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는 벨기에 구호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민간 구호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복잡한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를 특유의 행정력과 협상력으로 돌파한 그는 매일 수백만 명의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미국의 참전 이후에는 국가 식량관리국을 이끌며 효율적인 배급과 절약 운동을 주도해 ‘음식 독재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미국 구호국(ARA)의 수장으로서 적대국이었던 러시아의 기아 사태까지 외면하지 않고 식량을 지원했다. 이념을 넘어 수천만 명의 생명을 살려낸 이 위대한 인도주의적 업적은 그를 단숨에 전 세계적인 영웅이자 성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만들었다.
[4] 만능 상무장관, 백악관에 입성하다
세계적인 영웅이 된 후버에게 정계의 러브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하딩과 쿨리지 행정부에서 상무장관을 지내며 단순한 관료를 넘어 정부 전체를 조율하는 핵심 브레인으로 활약했다. 워낙 다방면에서 유능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모든 부서의 차관”이라 부르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1920년대 태동하던 라디오 방송 산업의 규제 기틀을 마련했고, 초기 항공 산업의 표준과 안전 기준을 세워 현대 미국 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행정가로서 보여준 완벽한 능력과 과학적 효율성은 대중에게 깊은 신뢰를 주었다. 마침내 192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그는 미국의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며 압도적인 표차로 대승을 거두었다.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동차를”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위대한 유능함으로 무장한 이 행정 전문가는 전 국민의 환호 속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다.
[5] 취임 첫해에 마주한 거대한 재앙, 대공황
영광의 정점은 너무나도 짧았다. 후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29년 10월,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가가 폭락하며 인류 역사상 최악의 경제 재앙인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번영을 구가하던 거품이 단숨에 꺼지자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고 기업들은 문을 닫았으며 수많은 노동자가 길거리로 나앉았다. 후버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를 마주하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는 처음에 이 위기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겪는 일시적인 진통일 뿐이며 미국의 경제적 기본 토대는 여전히 건강하다고 굳게 믿었다.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장의 자발적인 회복을 강조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으나, 재앙의 크기는 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서 있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자살자와 실업자의 행렬 속에서, 백악관 집무실의 불은 꺼질 줄 몰랐고 후버의 고독한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6] ‘후버빌’과 굳어버린 보수적 대처
위기가 심화될수록 후버가 가졌던 신념은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독이 되었다. 그는 엄격한 퀘이커교도적 성장 배경 속에서 형성된 ‘강한 개인주의’를 굳게 신봉하고 있었다. 연방 정부가 개인에게 직접 현금을 지원하는 구제책은 미국의 자립심과 개척 정신을 훼손하고 국가 의존증을 만들 것이라 믿었다. 그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기업과 은행에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우회적인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당장 오늘 먹을 빵이 없어 굶주리는 개개인에게 이 온기는 전혀 닿지 않았다. 사람들은 판자와 천막으로 지은 비참한 빈민촌을 대통령의 이름을 따 ‘후버빌’이라 불렀고, 추위를 막으려 덮은 신문지를 ‘후버 담요’라 부르며 조롱했다. 직접 구제를 기피한 그의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대처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고, 대중은 그를 차갑고 무자비한 대자본의 대변자로 기억하기 시작했다.
[7] 보너스 군대 진압과 참패로 끝난 퇴장
1932년 여름, 후버 행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힌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들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약속된 전쟁 보너스를 조기에 지급해 달라며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들었다. 이른바 ‘보너스 군대’라 불린 이들은 가족들을 동반한 채 평화적인 천막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후버 정부와 군 지도부는 이들을 폭동 세력으로 오인했고, 결국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정규군이 투입되어 최루탄과 기마대를 동원해 참전용사들의 천막촌을 강제로 불태우고 무력 진압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을 향한 과잉 진압은 전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독박 쓴 후버의 지지율은 바닥을 뚫고 추락했다. 결국 그해 말 치러진 대선에서 그는 뉴딜 정책을 들고나온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유례없는 참패를 당하며 쓸쓸히 백악관을 떠났다.
[8]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백악관을 떠난 후버의 삶은 실패자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는 퇴임 후 3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는 대신 수많은 책을 집필하며 자신의 정책을 소명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의 진가를 알아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공직에 복귀했다. 후버는 과거의 경험을 살려 전쟁으로 초토화된 유럽의 식량 구호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해 냈고, 수많은 생명을 다시 한번 굶주림에서 구해내며 잃어버렸던 명예를 회복했다. 대공황기 시절 분노한 민심에 의해 빼앗겼던 볼더 댐의 이름도 마침내 제 이름을 찾아 오늘날 ‘후버 댐’으로 당당히 불리고 있다. 비록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재앙을 막지 못해 불운한 대통령으로 남았지만, 정치를 떠나 인류를 향해 보여주었던 그의 위대한 인도주의적 업적과 헌신은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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