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3년 12월 5일】 흔들림 없는 정신의 사표 – 민족의 등불, 면암 최익현 선생 탄생
1833년 12월 5일, 대한제국이 태어나기 전 조선은 서구 열강의 문호 개방 압력과 내부의 혼란으로 요동치던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때 경기도 포천의 한 선비 가문에서 훗날 한말의 위대한 유학자이자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이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쇄도하는 외세의 물결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치열한 저항의 역사 그 자체이다. 최익현 선생의 탄생은 단순히 한 시대의 선비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직전,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굳건히 하고자 했던 숭고한 정신의 씨앗이 뿌려진 뜻깊은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는 흔들림 없는 의지로 민족의 앞날을 밝힌 등불과 같은 존재였다.
이항로 문하에서 배우고, 위정척사의 기치를 들다
최익현 선생은 유서 깊은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선구자였던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성리학을 깊이 탐구하는 한편, 이론적인 학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조국과 백성을 위한 애국의 실천 도덕을 강조하는 명분론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보다는 전통 질서를 수호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쏟아부었다.
최익현 선생의 위정척사 사상은 단순한 고루한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항의 물결 속에서 나라의 근간을 지키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보호하려는 강력한 애국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는 개항이 곧 외세의 침략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보았으며, 서양 문물의 무분별한 수용이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이념은 당시 역사적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구국애국 사상이자 민족주의 사상으로 승화 발전할 수 있었다.
단호한 상소와 의병 투쟁: 을사늑약에 맞서다
최익현 선생은 고종(高宗) 시대에 여러 차례 단호한 상소를 올려 부패한 관료들을 비판하고 국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개항이 시작되자, 그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한 위정척사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특히 대원군(大院君)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를 가기도 하는 등 그의 삶은 시대와의 끊임없는 불화와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투쟁이 절정에 달한 것은 1905년, 일제가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였다. 그는 당시 73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만 2천 리 강토를 오랑캐에게 빼앗길 바에야 차라리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켜야 한다"며 대일(對日) 항전의 선봉에 섰다. 그는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을사오적을 처단하고 매국노들을 응징할 것을 주장하며, 스스로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장 투쟁에 나섰다. "나는 한칼에 죽어 조상을 뵐 것이요, 너희들은 마땅히 힘을 합쳐 왜적을 몰아내라!"라고 외치며 노구를 이끌고 왜적에 맞섰다. 이는 늙은 선비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용맹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이었다.
대마도 유배와 불굴의 순국
최익현 선생의 의병 활동은 전국적인 항일 의병 운동의 불씨를 지폈지만, 중과부적으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제는 그를 군국 회의에 회부하여 "왜 너는 의병을 일으켰느냐"고 심문하였고, 그는 "일본의 한 신하로서 임금을 도둑질하고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동포를 노예로 삼은 을사오적을 주륙(誅戮)하려 했으니 죄가 된다면 차라리 죽음뿐이다!"라고 호통치며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일제는 그의 굳건한 기개와 노유(老儒)의 신분 때문에 감히 국내에서 그를 처형하지 못하고,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작은 섬인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대마도에서도 최익현 선생의 불굴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왜놈들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 투쟁에 나섰고, 심지어 굶주린 몸을 이끌고 맨발로 산에 올라 독립을 외쳤다. 일제가 제공하는 음식으로 연명할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는 그의 애국심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결국 그는 일제의 온갖 회유와 압박 속에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고 1906년 11월 17일, 유배지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면암 최익현이 남긴 불멸의 유산
면암 최익현 선생의 삶은 혼란했던 한말, 민족의 정신적 등불로 빛났다. 그는 굳건한 지조와 불굴의 투쟁 정신으로 일제에 맞서 싸우다 산화하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다.
- 위정척사 정신의 실천: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대일 항쟁으로 이어지는 위정척사 정신을 몸소 보여주었다.
- 항일 의병의 기폭제: 을사늑약에 맞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적인 의병 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이는 일제 강점기 내내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 민족의 정신적 지주: 늙은 몸으로도 죽음을 불사하며 일제에 항거한 그의 삶은 당시 핍박받던 민족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민족의 독립과 주체성을 외치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애국자의 표상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에는 그의 대의비를 기리는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세워져 있으며, 모덕사 등 여러 사당에서 그를 봉향하고 있다.
1833년 12월 5일 태어난 최익현 선생은 개인의 안위보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진정한 선비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민족의 자주성과 불굴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거대한 봉우리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가 심었던 애국과 정의의 씨앗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롭고 독립된 대한민국을 있게 한 굳건한 뿌리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