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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치욕의 날 – 을사조약 강제 체결

19051117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치욕의 날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을사조약의 배경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과 국제 정세

 
1905년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시기였다. 오랜 기간 한반도 지배를 목표로 삼았던 일본 제국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한반도 침략을 막을 국제적 걸림돌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서구 열강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거나 방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가쓰라-태프트 밀약(・タフト協定)과 영국과 일본 사이에 갱신된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은 이러한 국제 정세의 단면을 보여준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승인하는 비열한 밀약을 맺은 것이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홀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야 하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방한과 조약 강제 체결 과정

 
러일전쟁 승리 직후인 1905119,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규모 군대를 대동하고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목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대신들을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그는 조약안을 거절할 경우 대한제국이 더 큰 곤란에 처하게 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협박하였다.
 
고종 황제(高宗, 1852~1919)는 신료들의 자문과 백성의 의향을 살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항변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오직 대신들의 의견만을 묻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1116일과 17일 양일에 걸쳐 이토 히로부미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는 대신들을 소집하여 조약 체결에 대한 찬성을 요구했다. 대신들은 처음에는 고종 황제의 뜻을 따르며 조약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야시 공사는 대신들을 이끌고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경운궁(慶運宮)으로 향했다.
 
1117일 오후 4시에 시작된 어전회의는 7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오후 8시경 고종 황제는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이토에게 대신들이 조약에 반대하니 협의 확정을 유예해 달라고 전하였다. 그러나 이토는 이를 묵살하고 즉시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입궐을 시도했으나, 고종이 신병을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다.
 
이토는 어전회의장으로 돌아가 대신 한 명 한 명에게 조약 찬반을 직접 물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극렬하게 반대하다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감금되었고,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또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다섯 명의 대신은 조약에 찬성하였다. 이들은 훗날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다수결에 의해 조약안이 가결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일본 군대를 동원하여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職印)을 강제로 탈취해 조약에 날인함으로써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다.
 

을사조약의 내용과 그 불법성

 
을사조약의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 또는 '2차 한일협약'이지만,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으로 불린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하는 것이었다.
 
  •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 대한제국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는 국제사회에 대해 어떤 외교 행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외국에 있던 대한제국 외교기관은 전부 폐지되었고, 각국에 주재하던 한국 외교관들은 본국으로 철수해야 했다.
  • 통감부(統監府) 설치 :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통감(統監)이 외교와 내정 전반을 지휘 감독하며 사실상 대한제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 조약은 국제법상 심각한 결함이 있는 불법적인 조약이다.
 
  • 첫째, 고종 황제의 비준(批准)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 조약은 국가원수의 비준이 필수적이지만, 을사조약은 고종의 승인 없이 강제로 날인되었다. 실제로 고종은 조약 체결 나흘 뒤인 1122, 미국에 체재 중인 황실 고문 헐버트(Homer B. Hulbert)에게 조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도록 지시하는 등 끊임없이 무효화를 주장하였다.
  • 둘째, 일본 군대의 위협과 강압 속에서 체결되었기에 조약의 자율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
  • 셋째, 조약 체결 과정에 참여한 을사오적은 대한제국 백성들을 대변하는 정당한 대표성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을사조약은 오늘날까지도 그 불법성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민족의 저항과 애국지사들의 순국

 
을사조약 체결 소식은 대한제국 전역을 분노와 슬픔으로 뒤덮었다. 지식인들과 백성들은 일본의 침략과 매국노들의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불태웠다.
 
  • 언론의 저항 : 황성신문(皇城新聞) 주필 장지연(張志淵)19051120일자 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며 매국 대신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이는 전국민적인 저항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 애국지사들의 자결 순국 : 대한제국 특진관 민영환(閔泳煥)은 조약 체결에 통분하며 국민된 자가 어찌 자기의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러 죽지 않고 살기를 구하겠는가?”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조병세(趙秉世) 등 많은 지사들도 뒤를 이어 순국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 의병 활동 : 을사조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義兵)이 다시 봉기하여 일본군과 매국노들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 수많은 의병장들이 이끌던 의병 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에 대한 강력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 오적 암살 시도 :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등 애국지사들은 을사오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 처단에 나섰다. 비록 암살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는 망국적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되찾으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이었다.
 

을사조약이 남긴 역사적 의미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치욕적인 첫 단계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고 통감부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사실상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이는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이어지는 일제 식민 지배의 길을 열어준 불법적인 조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을사조약은 민족의 위기 앞에서 더욱 강력하게 타오른 애국심과 독립 정신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 황제의 항거, 언론의 비판, 애국지사들의 순국, 의병 활동의 전개 등 다양한 형태의 저항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주권을 지키려 했던 굳건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을사조약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과 자주성을 되새기고 역사의 교훈을 얻는 중요한 상징으로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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