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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2일 토요일

【1897년 11월 22일】 2년 2개월 만의 비원 – 명성황후 국장 거행

1897112222개월 만의 비원 명성황후 국장 거행

 

시해의 비극을 넘어선 22개월 만의 비원 명성황후 국장 거행

 
18971122일은 대한제국이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국격과 황실의 존엄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날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일본에 의해 처참하게 시해된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의 국장(國葬)이 그로부터 22개월 만에 거행된 것이다. 단순한 장례를 넘어선 이 국장은 일본의 침략 야욕과 맞서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려던 고종(高宗, 1852~1919) 황제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역사적 사건이다. 온 국민이 슬픔 속에 지켜본 황후의 마지막 길은 망국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던 우리 민족의 단면을 보여주는 비극이자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을미사변, 비극의 시작과 명성황후 시해

 
1895108,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 건청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 아래 일본 낭인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만행이었다. 황후의 시신은 불태워지고,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의 주권이 유린당하고 왕실의 존엄이 훼손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전 국민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2년간의 비정상적인 공백과 고종의 투쟁

 
명성황후가 시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국장이 거행되지 못하고 2년이 넘는 긴 공백이 발생한 것은 당시 조선의 위태로운 정세 때문이다. 시해 직후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국왕 폐비 조칙'까지 발표해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일본은 친일 세력을 내세워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고, 고종은 이에 저항하여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처럼 고종이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고, 시해된 황후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이어졌다. 황후의 빈전에서 대렴(大斂: 시신을 염하는 일)과 성복(成服: 상복을 입는 일)1895128일에야 겨우 거행될 수 있었으나, 장례식은 요원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와 국장의 정치적 의미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난 고종은 18972월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자주독립국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18971012,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며 연호를 광무(光武)로 제정한다. 이로써 조선은 자주적인 황제국임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명성황후의 국장은 바로 이 대한제국 선포 직후에 거행된다. 황후의 장례는 단순히 개인에 대한 추모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황실의 권위와 국가의 존엄을 되찾는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었다. 황후에게는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올려져 황후로서의 정당성과 희생을 기렸다. 시호 봉상 의식은 1897116일 명성황후의 빈전에서 거행되었다.
 

장엄하게 치러진 국장 절차

 
18971121, 명성황후의 빈전에서 발인(發靷)이 거행되었다. 발인은 상여가 궁궐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122일과 23일에 걸쳐 국장의 주요 의식이 치러진다. 대한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듯 이 국장은 조선 왕조의 모든 장례 의례를 총동원하여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상여 행렬은 수많은 의장과 참여 인력으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으며, 백성들은 도로 양옆을 가득 메워 국모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홍릉에 안치되다

 
명성황후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재의 청량리 밖에 있던 홍릉(洪陵)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이후 고종 황제가 191933일에 승하한 후, 19195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천장(遷葬)되어 고종 황제와 함께 합장(合葬)되었다. 지금의 홍릉은 바로 이 합장묘이다. 명성황후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대한제국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오늘의 역사에 새겨진 명성황후 국장의 의미

 
18971122일의 명성황후 국장 거행은 단순히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장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무도한 침략과 폭력에 맞서 자주적인 국가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의 고단한 노력,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던 민족의 의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후의 시해부터 국장까지의 22개월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조선이 일제의 마수 아래에서 얼마나 큰 고난을 겪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기록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며, 강인한 민족의 독립 정신과 국가 주권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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