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1월 26일】 조선, 조영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서구 열강의 문턱을 넘다
1883년 11월 26일, 대한제국으로 나아가기 전 조선이 대영제국, 즉 영국과 정식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세계사의 격류에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 조약은 1876년 강화도 조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에 이은 서구 열강과의 세 번째 조약으로, 조선이 쇄국의 문을 더욱 넓게 열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조약은 근대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통상 압력 속에서 조선이 주권을 침해당하는 불평등 조약의 전형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조약이 체결된 배경과 그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고,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한다.
혼란의 시기, 조선과 영국
19세기 후반, 세계는 제국주의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다. 아시아 각국은 서구 열강들의 무력 시위와 통상 요구에 직면하며 문호를 개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은 일찍이 조선과의 교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76년 가을부터 영국의 실비어호(The Sylvia)와 스윙거호(The Swinger)는 경상도 해안을 실측 조사하였고, 바바라 테일러호(The Barbara Taylor)가 제주도 근해에서 난파되어 구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나가사키의 영국 영사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1881년 6월에는 페가서스호(Pegasus)가 조선 관원과 통상 담판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본격적인 조약 체결의 물꼬가 트인 것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타결된 직후였다. 미국에 이어 조선과의 통상 관계를 확립하려던 영국은 1882년 윌리스 제독(Admiral George O. J. Willes)을 전권으로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선 측에서는 조영하를 전권대신으로, 김홍집을 부관으로, 서상우를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같은 해 4월 21일 인천에서 조영 회담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청나라 마건충(馬建忠)과 정여창(丁汝昌)의 입회 하에 1882년 6월 6일 자로 전문 14조로 된 ‘조영수호통상조약’에 조인했다.
재협상과 불평등의 조영수호통상조약
그러나 윌리스 제독이 체결한 1882년 조약은 영국 정부의 비준을 받지 못했다. 영국 정부는 이 조약이 ‘조일수호통상조약’(강화도조약)에 비해 "영국의 무역과 영국민의 지위 보장이란 견지에서 커다란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하며 비준을 유보하였다. 이는 당시 조선이 일본과 맺은 조약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영국에 제공하지 못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영국은 1883년 10월 27일, 당시 주청 영국 공사였던 해리 파크스(Harry Parkes, 1828~1885)를 조선에 파견하여 재협상에 돌입했다. 조선 측 전권대신은 민영목(閔泳穆, 1858~1890)이었다. 재협상 끝에 1883년 11월 26일,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 원문과 부속통상장정, 세칙장정, 선후속약이 조인되었다. 이듬해인 1884년 4월 28일, 해리 파크스와 김병시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면서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이 조약에는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불평등 조항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영사재판권(치외법권) : 조약 제4조는 영국인이 조선에서 죄를 범했을 때, 조선 법정에 서지 않고 영국 영사에게 재판을 받도록 규정했다. 이는 조선의 사법 주권이 침해되는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이었다.
- 관세 자주권 상실 : 조약 제6조는 외국무역에 대하여 개항되지 않은 조선 항구에서 밀수입이나 밀수출을 시도하는 영국 국민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화물을 몰수할 수 있으나, 이들에 대한 재판은 영국 영사에게 인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특히, 조선 정부가 독자적으로 관세율을 정하지 못하게 하여 경제적 자주권을 제약했다.
- 개항장 확대 및 거류 허용 : 부산, 인천, 원산 등의 개항장에서 영국 상인의 무역 활동을 보장하고, 이들 지역에 영국인이 거주하며 토지를 임대, 매매할 수 있도록 했다.
- 최혜국 대우 : 조약 제10조에는 '최혜국 대우' 조항이 포함되어,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에서 영국보다 유리한 조건이 있을 경우, 그 조건이 자동으로 영국에도 적용되도록 함으로써 불평등 조약의 확산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 군함의 자유로운 입항 : 조약 제8조는 영국 군함이 조선의 모든 항구에 자유롭게 입항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선원들의 상륙까지 보장했다. 이는 조선의 해상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이었다.
- 난파선 구호 의무 : 조약 제7조는 영국 상선이 조선 해안에서 난파될 경우 조선 지방관이 선박과 화물을 보호하고 영국인에게 원조를 제공하며, 그 비용은 영국 정부가 상환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조약 체결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조영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은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영국이라는 강대국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조선의 국제적 위상이 어느 정도 높아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서구의 근대 문물과 사상이 조선에 유입되는 통로가 열렸다. 영국의 발달된 산업 기술과 상업 시스템에 대한 간접적인 경험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조약이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영사재판권과 관세 자주권의 상실은 조선의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했으며, 영국 상인들의 활동 증가는 조선의 전통 시장과 상업 질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최혜국 대우 조항은 이후 다른 서구 열강들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에도 영향을 미쳐, 조선의 국권이 약화되는 과정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의 경제적, 정치적 침투는 결국 조선의 자립 기반을 흔들고 식민지화를 향한 길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의 역사, 그 의미를 되새기며
1883년 11월 26일 체결된 조영수호통상조약은 단순히 조선과 영국 두 나라 사이의 문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만남 속에서 겪어야 했던 비극적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 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는 격동의 시기에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였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국가의 주권과 자립적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조영수호통상조약은 우리에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이 아픈 역사는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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