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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0일 토요일

평민 출신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네 황제의 해를 끝내고 콜로세움을 세우다

평민 출신 무장, 로마의 정점에 서다

서기 9년, 이탈리아 팔라크리눔(Falacrinum)의 평민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로마 제국 제9대 황제에 오르는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9~79)다. 당시 세습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던 로마 정치 지형에서 평민(Plebeian) 출신이었던 그는 혈통적 특권에 의존할 수 없었다. 오직 실전에서 증명해 낸 행정 역량과 군사적 공훈만이 그의 유일한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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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진가가 역사에 폭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서기 60년대 후반 발발한 제1차 유대-로마 전쟁(First Jewish-Roman War)이었다. 제국의 핵심 동방 전선이 위협받는 가운데, 군 지휘관으로 투입된 그는 탁월한 전략으로 반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이때 획득한 막대한 전리품과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포로 노동력은 훗날 그가 제국의 권력을 쟁취하고 재정을 회복할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네 황제의 해, 플라비우스 왕조의 개창

서기 69년, 로마 제국은 극도의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갈바(Galba, 3~69), 오토(Otho, 32~69), 비텔리우스(Vitellius, 15~69) 세 명의 황제가 불과 1년 사이에 연이어 암살되거나 처형되는 이른바 '네 황제의 해(Year of the Four Emperors)'였다. 붕괴 직전의 제국을 구원한 것은 동방 주둔 군대의 강력한 추대를 받은 베스파시아누스였다.

그는 내전에 개입하여 전임자 비텔리우스를 축출하고 서기 69년 7월 1일,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참혹했던 내전이 종식되고 플라비우스 왕조(Flavian dynasty)가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평민 출신 황제라는 꼬리표는 그에게 군대와 시민, 원로원 모두를 납득시킬 압도적인 리더십과 정통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거대한 숙제를 안겨주었다.

[표] 베스파시아누스 생애 핵심 분기점 요약

시기핵심 사건역사적 의미 및 파급효과
출생 및 청년기팔라크리눔 출생 (AD 9)평민 출신으로 실력 중심의 군사적·행정적 경력 개척
즉위 직전제1차 유대-로마 전쟁 승리막대한 전리품과 1.5만 명의 포로 확보, 권력 쟁취의 자산 마련
AD 69년 7월네 황제의 해' 내전 종식비텔리우스를 축출하고 제9대 황제 즉위, 플라비우스 왕조 개창
AD 75년경원형 경기장(콜로세움) 착공네로의 사유지를 시민에게 환원하여 정치적 정통성 획득
AD 79~80년황제 서거 및 콜로세움 완공재정 회복 후 티투스에게 권력 이양. 이듬해 콜로세움 전격 개장

시민을 위한 무대, 콜로세움의 진실

재위 후반기인 서기 75년경, 베스파시아누스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전대미문의 프로젝트를 전격 결단한다. 폭군 네로(Nero, 37~68)가 사유화했던 도심의 황금궁전(Domus Aurea) 부지를 로마 시민의 공공 공간으로 환원하는 대규모 토목 공사였다.

이 경기장의 공식 사료상 명칭은 황제 가문의 이름을 딴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Flavian Amphitheatre)'이다. 오늘날 전 세계가 부르는 '콜로세움(Colosseo)'이라는 명칭은 당시 경기장 인근에 서 있던 '네로의 거대한 청동상(Colossus of Nero)'에서 유래한 후대의 별칭일 뿐이다.

또한 대중의 흔한 오해와 달리, 현재 콜로세움 외벽에 뚫려 있는 수많은 네모난 구멍들은 전쟁이나 포격의 흔적이 아니다. 이는 로마 제국 몰락 이후 건물이 창고와 예배당 등으로 재활용되던 중세 시대에, 사람들이 석재 내부에 박혀 있던 결합용 철제 고정재(클램프)를 강제로 파내어 약탈해 가면서 남겨진 상흔이다.

로마 공학의 결정체, 그리고 제국의 빛과 그림자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은 외벽 높이 48m(현대 18층 규모), 장축 188m에 달하며 최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대 공학의 정수다. 티볼리(Tivoli)산 석회와 화산재를 혼합한 로마식 콘크리트(Opus Caementicium, 오푸스 카이멘티키움)를 사용하여 뼈대를 신속하게 올렸다.

특히 1층은 도리아식(Doric), 2층은 이오니아식(Ionic), 3층은 코린토식(Corinthian) 기둥으로 장식된 240개의 외벽 아치(Arch)를 비롯해, 총 600~800여 개의 아치가 구조 전체의 하중을 완벽하게 분산시켰다.

"로마인들이 기둥과 보를 이제 장식적인 요소로 다루기 시작했다." (양정무, 《미술 이야기 2》)

아치 구조가 건물의 무게를 짊어지면서,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하중을 감당하던 기둥과 보는 아름다운 외벽 장식재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된 아치 기술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로마로 전파되었고, 로마는 이를 실용적으로 변형하고 대규모 건축에 적용했다." (박인석, 《건축 생산 양식 1》)

로마의 진정한 위대함은 기술을 무에서 유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선대 문명들의 기술을 흡수해 로마식 콘크리트와 결합하여 범제국적 규모로 집대성한 데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에 스며든 역사적 역설

10년간의 치세 동안 텅 비었던 국고를 철저히 관리하고 제국의 안정을 확립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서기 79년, 향년 69세로 서거했다. 권력은 장남 티투스(Titus, 39~81)에게 안정적으로 이양되었고, 이듬해인 서기 80년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은 마침내 완공되어 로마 시민들 앞에 전격 개장되었다.

평민에서 출발해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황제는 네로가 독점했던 땅을 시민에게 돌려주며 '황제의 은혜'를 역사에 각인시켰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굳건히 서 있는 그 웅장한 아치 아래에는, 유대 민족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 수탈과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포로들의 가혹한 핏방울이 짙게 배어 있다.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은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던 흙수저 황제의 치열한 통치 철학과 고대 제국주의의 차가운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는 가장 완벽한 역사적 증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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