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쪼개진 제국과 현대 유럽의 탄생
843년 8월 10일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질 유럽의 지정학적 형태와 국경의 밑그림이 완성된 결정적인 날이다. 이날 현재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 베르됭(Verdun)에서 세 명의 왕이 모여 거대한 제국을 세 조각으로 분할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른바 '베르됭 조약(Treaty of Verdu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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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됭 조약(영어: Treaty of Verdun, 프랑스어: Traité de Verdun) |
조약의 당사자들은 서유럽을 최초로 통일했던 위대한 군주 카를 대제(샤를마뉴)의 세 손자들이었다. 이들은 권력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결국 군사적 우위를 가리지 못한 채 타협을 선택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을 하나의 깃발 아래 모았던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제국)'은 해체되었고, 다시는 하나로 합쳐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분할은 단순한 제국의 몰락이 아니었다. 훗날 각각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라는 거대한 국민국가로 발전하게 될 정체성과 언어적 경계가 비로소 역사 무대 전면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843년 8월 10일의 베르됭 조약이 어떻게 체결되었으며, 이 종이 한 장이 유럽의 역사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 깊은 내막을 살펴본다.
1. 카를 대제의 유산과 '분할 상속'이라는 시한폭탄
이야기의 시작은 조약 체결 전인 8세기 말과 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를 대제(Charlemagne)는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베네룩스 3국을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했다. 그는 800년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며 보편적이고 통일된 기독교 제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프랑크족을 비롯한 게르만 전통에는 제국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관습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죽으면 모든 아들들에게 재산과 영토를 똑같이 나누어주는 '분할 상속(Partible inheritance)'관습이었다. 국가를 공적인 제도가 아닌 군주의 사유 재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카를 대제 역시 이 전통에 따라 제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아들 중 '경건왕'이라 불린 루트비히 1세(Louis the Pious)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814년 단독으로 제국을 물려받았다. 덕분에 제국의 분열은 한 세대 유보될 수 있었다.
2. 경건왕 루트비히의 고뇌와 꼬여버린 후계 구도
단독 황제가 된 루트비히 1세는 로마적이고 기독교적인 '단일 제국'의 이상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817년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을 발표하여 장남인 로타르 1세(Lothair I)에게 황제의 칭호와 제국의 심장부를 몰아주고, 나머지 아들인 피핀과 독일인 루트비히(Louis the German)에게는 변방의 작은 왕국만을 다스리게 하는 파격적인 상속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 계획은 루트비히 1세의 개인사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첫 번째 아내가 죽고 바이에른 출신의 유디트와 재혼한 루트비히 1세가 823년 늦둥이 아들 카를(Charles the Bald, 대머리왕 카를)을 낳은 것이다.
황제는 사랑하는 막내아들 카를에게도 영토를 떼어주기 위해 기존의 상속 계획을 거듭 수정했다. 이는 이미 자신의 몫을 확정받았던 본처 소생의 형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상대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를 폐위시켰다가 복위시키는 등 제국은 극심한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3. 내전의 폭발: 폰트누아 전투와 스트라스부르 서약
840년, 끝없는 내전 속에 아버지 루트비히 1세가 세상을 떠났다. 차남 피핀은 그보다 먼저 사망한 상태였다. 이제 제국은 장남 로타르 1세, 삼남 독일인 루트비히, 그리고 이복동생인 대머리왕 카를세 명의 형제 손에 남겨졌다.
장남 로타르 1세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제국 전체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동생들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동생 루트비히와 카를은 동맹을 맺고 큰형 로타르에게 맞섰다.
폰트누아 전투 (841년)
841년 6월, 세 형제의 군대는 오세르 인근의 폰트누아(Fontenoy-en-Puisaye)에서 격돌했다. 이 전투는 프랑크 왕국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끔찍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이 전투에서 동생 연합군(루트비히와 카를)이 로타르 1세의 군대를 격파하며 승기를 잡았다.
스트라스부르 서약 (842년)
전투 이듬해인 842년 2월 14일, 동생인 독일인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은 스트라스부르에 모여 로타르에 대항하는 상호 방위 동맹을 공개적으로 맹세했다. 이것이 유명한 '스트라스부르 서약(Oaths of Strasbourg)'이다.
이 서약은 언어학적으로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두 왕은 병사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닌 각자의 지역 언어로 맹세했다. 카를의 병사들(서프랑크)을 위해 루트비히는 고대 프랑스어(로망스어)로 맹세했고, 루트비히의 병사들(동프랑크)을 위해 카를은 고대 고지 독일어(게르만어)로 맹세했다. 이는 당시 제국의 서쪽과 동쪽이 이미 언어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갈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4. 843년 8월 10일, 베르됭에서의 역사적 분할 합의
스트라스부르 서약으로 강력한 동맹이 구축되자, 궁지에 몰린 로타르 1세는 더 이상의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세 형제는 영토의 지리적 크기와 경제적 가치(주교좌, 수도원, 농경지 등)를 면밀히 조사하고 평가한 끝에, 843년 8월 10일 마침내 베르됭 조약을 체결했다.
제국은 세 개의 굵직한 세로축으로 분할되었다.
서프랑크 왕국 (West Francia): 대머리왕 카를 차지
- 영토 : 뫼즈(Meuse) 강과 론(Rhône) 강 서쪽의 영토. 오늘날의 프랑스 대부분에 해당한다.
- 특징 : 로망스어(고대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는 지역으로, 훗날 프랑스국가 형성의 모태가 되었다.
동프랑크 왕국 (East Francia): 독일인 루트비히 차지
- 영토 : 라인(Rhine) 강 동쪽과 알프스 북부 지역.
- 특징 : 게르만 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지역으로,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을 거쳐 독일국가 형성의 뼈대가 되었다.
중프랑크 왕국 (Middle Francia): 황제 로타르 1세 차지
- 영토 :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사이의 길고 좁은 회랑 지대. 북해 연안(현 네덜란드/벨기에)에서 시작해 로렌, 부르고뉴, 알프스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와 로마에 이르는 지역이다.
- 특징 : 로타르는 명예로운 황제의 타이틀과 제국의 두 수도(로마, 아헨)를 차지했으나, 이 영토는 지리적으로 너무 길고 방어에 취약하며 언어적으로도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5. 중프랑크의 비극과 천년을 이어진 영토 분쟁
베르됭 조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로타르 1세가 차지한 '중프랑크'의 운명이다. 중프랑크는 국가로서의 생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로타르 1세가 죽은 뒤 중프랑크는 그의 아들들에게 다시 3분할 되었고, 아들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양옆의 강대국인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이 영토를 집어삼키기 위해 달려들었다. 결국 870년의 메르센 조약(Treaty of Meerssen)과 880년의 리브몽 조약(Treaty of Ribemont)을 거치며 중프랑크 영토의 북부(로타링기아)는 양분되어 서프랑크와 동프랑크에 흡수되었다. 이로써 중프랑크는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했고 이탈리아 왕국만이 분리되어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프랑크의 핵심 영토였던 알자스(Alsace)와 로렌(Lorraine, 로타링기아에서 유래)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국경 지대로 전락했다. 베르됭 조약으로 그어진 이 모호한 경계선은 이후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양국 간의 처절한 영토 분쟁을 낳았다. 17세기 30년 전쟁, 19세기 보불전쟁, 그리고 20세기의 제1,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알자스-로렌을 둘러싼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사실상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잉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한눈에 보는 카롤링거 제국의 분할 과정
- 카를 대제 사망(814년) :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카를 대제가 서거하고, 경건왕 루트비히 1세가 단독으로 제국을 승계하다.
- 제국 칙령(Ordinatio Imperii) 발표(817년) : 루트비히 1세가 장남 로타르에게 제국의 종주권을 부여하는 상속안을 발표하다. 이후 이복동생 카를의 탄생으로 갈등이 촉발된다.
- 루트비히 1세 사망 및 내전 발발(840년) :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하자 로타르 1세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세 형제 간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다.
- 폰트누아 전투(841년) : 동생 연합군(독일인 루트비히, 대머리왕 카를)이 장남 로타르 1세의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다.
- 스트라스부르 서약(842년 2월) : 두 동생이 각자의 언어(로망스어, 게르만어)로 병사들 앞에서 상호 방위 동맹을 맹세하다.
- 베르됭 조약 체결(843년 8월 10일) : 제국을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3국으로 공식 분할하다. (프랑스와 독일의 모태 형성)
- 메르센 조약 체결(870년) : 중프랑크 황제 로타르 2세 사망 후, 서프랑크와 동프랑크가 중프랑크의 북부 영토(로타링기아)를 분할 흡수하다.
마치며: 하나의 문서가 결정한 천년의 운명
843년 8월 10일에 체결된 베르됭 조약은 한 가문의 유산 상속 다툼을 마무리 지은 타협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약에 서명한 세 형제 중 누구도 자신들의 결정이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거대한 근대 국민국가의 지리적, 언어적 기틀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조약을 기점으로 유럽이 보편적인 통일 제국의 꿈을 접고, 각자의 언어와 문화를 지닌 다원화된 국가 체제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틀었다. 조약이 체결되었던 도시 '베르됭'이 훗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 양군을 합쳐 7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베르됭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베르됭 조약은 단순한 영토 분할선을 넘어, 현대 유럽인들의 정체성과 지정학적 갈등의 뿌리가 모두 담겨 있는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역사적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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