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 1918년, 시대적 배경과 '유심' 창간의 전략적 가치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소위 '무단통치'가 극에 달해, 민족의 생존권은 물론 언어와 사상의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언론 암흑 정책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해 모든 언론 활동을 봉쇄했으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강압은 민족 투쟁의 불씨를 더욱 견고하게 달구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불교월보》나 《해동불보》와 같은 몇몇 종교지들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1918년 9월 1일 만해 한용운이 창간한 잡지 '유심(惟心)'은 단순한 종교 잡지의 경계를 넘어 민족 정신사의 한 획을 긋는 전략적 등불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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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심 창간호(출처: 홍주일보) |
'유심'이라는 제호는 화엄경의 핵심 사상인 '마음이 만물의 본체이며 유일한 실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모든 존재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일제의 압제 아래 위축된 민족의 자아를 일깨우고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철저한 사상적 기획이었다. 만해는 창간 전해인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 중 홀연히 깨달음의 문을 열며 "한마디 큰 소리로 삼천대천세계를 뒤흔드니, 눈 속에 복사꽃이 붉게 피어난다"는 내용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긴 바 있다. 여기서 '눈'이 일제의 무단통치를 상징한다면 '붉은 복사꽃'은 민족을 향한 변치 않는 일편단심(一片丹心)이었다. 이 거대한 원력을 품고 상경한 만해에게 '유심' 창간은 민족의 눈과 귀를 여는 '영혼의 노래'이자, 대장부로서 가야 할 실천적 구국 운동의 시작이었다.
2. 잡지 '유심(惟心)'의 탄생과 창간 개요
'유심'은 1918년 9월 1일,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에 위치한 '유심사(惟心社)'에서 그 첫 숨을 내뱉었다. 이곳은 만해의 거처이자 잡지 발행을 위한 산실이었으며, 훗날 3·1 독립운동을 기획하는 전위적 거점이 되었다. 만해는 자신의 수필 '전가의 오동(前家의 梧桐)'에서 당시의 거처를 "계동 막바지의 여두소옥(如斗小屋, 말 한 되 크기만 한 작은 집)"이라 묘사했다. 비록 공간은 협소했으나 지형이 높아 일광이 풍부하고 공기가 청신하여, 그곳에서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올 지혜를 긷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잡지의 물리적 실체와 발행 환경은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기록으로 전해진다.
- 창간 및 종간: 1918년 9월 1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10월에 제2호, 12월 1일 제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다.
- 편집 겸 발행인: 만해 한용운(韓龍雲).
- 발행 규격: 국판 60여 페이지 분량의 월간 교양지로 발행되었다.
- 인쇄처: 당시 을지로 2가 21번지에 있던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인쇄를 담당했다.
비록 '유심'은 일제의 검열과 압수, 그리고 3·1 운동이라는 더 큰 역사적 흐름 속에서 단 3호 만에 종간되었으나, 만해는 이 매체를 통해 세계 정세의 흐름과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는 형안(炯眼)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 화려한 필진과 '유심'이 담아낸 종합 교양의 시대정신
'유심'은 불교적 사상을 근간으로 삼으면서도 시, 소설, 수필, 논설은 물론 과학 지식까지 망라한 근대적 종합 교양지를 표방했다. 필진의 구성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결집한 민족 역량의 총합이었다. 불교계에서는 박한영, 백용성, 권상로, 이능화, 김남천, 강도봉 등이 참여했고, 사회 인사로는 최린, 최남선, 유근, 현상윤, 임규 등이 대거 포진했다. 이러한 필진의 결합은 종교 활동을 민족 계몽운동으로 승화시키려는 전략적 연대였다.
잡지에 게재된 글들은 청년들의 수양과 자아 확립을 준엄하게 꾸짖고 독려했다. 최남선의 '동정받을 자 되지 말라'는 약자의 비굴함을 버리고 세계의 주인공이 될 것을 역설했고, 최린은 '시아수양관(是我修養觀)'을 통해 자아 수양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만해 본인 또한 '조선 청년 수양', '가정 교육이 교육의 근원이다', '항공기 발달 소사', '과학의 연원' 등 종교인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전방위적인 논설을 쏟아냈다. 특히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생의 실현(Sadhana)'을 번역 소개한 점은 '유심'이 폐쇄적인 종교지를 넘어 세계사적 안목을 지닌 사상지였음을 증명한다. 만해는 창간호 머리말 '처음에 씀'에서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의 장애를 타파하고 대양에 도착하는 득의(得意)의 파도를 보라"고 일갈하며 조선 청년들이 목적지에 도달하는 끈기를 갖출 것을 주문했다.
4. 한국 문학사의 거대한 발자취: '심(心)'과 현상문예의 성취
문학사적으로 '유심'은 한국 근대 시와 소설이 발아하고 완성되는 비옥한 토양이었다. 가장 주목할 성취는 만해의 자유시 '심(心)'이 1918년 창간호에 발표된 사실이다. 이는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통용되던 주요한의 '불놀이'(1919)보다 1년이나 앞선 것으로, 한국 시사에서 산문시의 형식을 돈오(頓悟)적으로 완성한 선구적 사례다. 이 시는 '심(心)은 심이니라'로 시작하여 물질계와 무형계, 생과 사를 모두 '마음'으로 통합하는 심오한 형이상학을 보여준다.
또한 '유심'은 적극적인 현상문예 공모를 통해 새로운 문학 세대를 발굴했다. 보통문, 단편소설, 신체시, 한시의 4개 분야로 진행된 공모는 내용 중심의 사상을 갖춘 문학 정신을 강조했다.
- 제3호 당선작: 방정환(소설 '고학생'), 김순석(논문 '인생의 진로').
- 가작 당선자: 김형원, 박중빈, 어효선 등 훗날 한국 문단과 사회를 이끄는 거목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특히 만해 문학의 정수인 '님의 침묵'에 나타나는 '다양한 화자의 발견'과 '기표의 열림'은 이미 '유심' 시절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만해는 '님'을 불교, 철학, 자연, 정치 등 다양한 층위로 열어두며 독자가 스스로 그 의미를 채우게 했다. 이는 깨달음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고통받는 중생의 세계로 돌아가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사상적 발현이었으며, '유심'은 그 시적 실험이 이루어진 거대한 광장이었다.
5. 3·1 독립운동의 요람: 전위지로서의 유심사
'유심'의 발행지 유심사는 단순한 잡지사를 넘어 3·1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위적 거점이었다. 1919년 기미년의 거사는 '유심'을 통해 맺어진 인적 네트워크와 사상적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의 최린이 계동의 유심사를 방문하여 만해와 회동하면서 불교계의 민족대표 참여가 확정되었고, 이로써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민족대표 골격이 완성되었다.
거사 전야인 2월 28일 밤, 유심사는 긴박함이 감도는 역사의 한복판이었다. 만해는 자신의 거처로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 학생 10여 명(유심회)을 급히 불러 독립선언서 3,000매를 전달하며 배포 임무를 맡겼다. 당시 영남 유림의 거두 곽종석을 포섭하려 했으나 급환으로 인해 인장만 전달받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유심사를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의 기획은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전위적 활동은 훗날 만해의 법정 증언에서 정점에 달한다. "서울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일제 검사의 질문에 그는 추호의 망설임 없이 "유심지 하러 왔다"고 답했다. 이는 잡지 발행 자체가 곧 독립운동의 실천이었으며, 일제의 검열과 탄압이라는 장애를 뚫고 민족의 자아를 일깨우려 했던 그의 의지가 잡지라는 매체와 일체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선언이었다.
6. 결론: 유심(惟心)의 현대적 계승과 역사적 교훈
'유심'은 비록 3호 만에 종간되었으나, 그 정신은 100년의 세월을 넘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유심'의 종간은 패배가 아니라 3·1 운동이라는 거국적 실천을 위한 필연적 전이(轉移)였다. 이러한 유심 정신은 2001년 무산 조오현 스님에 의해 시 전문지로 복간되었고, 2023년 9월 1일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통해 계간지로 재창간되며 새로운 부활을 알렸다. 권영민 이사장과 신달자 편집주간은 재창간을 통해 만해의 자유·평등 사상을 계승하고 인간 정신의 회복에 앞장서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역사의 현장인 계동 43번지에는 오늘날 '유심당'이라는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그 내력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흥미로운 점은 2012년 전까지 표지석이 엉뚱하게도 우물터인 계동 58번지에 잘못 설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보존하는 행위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일깨워주는 상징적 일화다.
'유심'이 우리에게 남긴 최종적인 가치는 '자유·평등·인간 정신의 회복'이다.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마음의 본체를 잃지 않고 주체적인 자아로 거듭나려 했던 만해의 원력은, 오늘날 물질문명의 혼돈 속에서 길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정신의 등불이다. '유심'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미래의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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