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평화로운 정오를 깨뜨린 거대한 재앙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32초. 일본 간토 지방의 평온한 토요일 점심시간은 찰나의 순간에 생지옥으로 변모했다. 사가미 해곡을 발원지로 한 규모 7.9의 거대한 지진이 가나가와현과 도쿄부를 강타했다. 당시 도쿄제국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데라다 도라히코는 카페에서 화가 쓰다 세이후와 홍차를 마시던 중 발밑을 나무망치로 난타하는 듯한 기괴한 진동을 느꼈다. 그는 곧이어 세상이 마치 거대한 배에 탄 듯 요동쳤으며, 건물이 '삐식삐식' 비명을 지르며 흔들리는 공포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대재앙은 단순히 땅이 흔들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지진 발생 시각이 각 가정에서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때와 겹치면서 도쿄 시내 136곳에서 동시에 화재가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노토반도 부근의 태풍이 몰고 온 강한 바람은 불길에 거대한 날개를 달아주었다. 스미다구의 육군본소 피복창 부지에서는 거대한 '화재선풍'이 발생하여 피난 온 시민들을 시신과 함께 15km 밖까지 날려버리는 참혹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구 도쿄시 면적의 약 43%가 소실되었고, 전체 사망자 10만 5천 명 중 90% 이상이 불에 타 숨지는 비극을 맞았다.
수도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네부카와역에서는 열차가 역사와 함께 통째로 토석류에 휩쓸려 바닷속으로 전락해 수백 명의 수중 무덤이 되었고, 통신과 철도는 끊겼다. 심지어 11월에 예정된 황태자 히로히토의 결혼 기념 우표와 원판마저 체신성 창고에서 전소될 정도로 피해는 전방위적이었다. 그러나 간토 대지진이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것은 자연의 분노 때문만이 아니었다. 무너진 건물과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공포는 곧바로 날 선 칼날이 되어 사회적 약자인 조선인을 향했다. 자연재해가 인간의 광기에 의해 참혹한 '인재(人災)'로 변모하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2. 광기의 확산: 유언비어라는 이름의 무기
재난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평등하게 찾아오지만, 그 처절한 책임은 대개 가장 약한 고리에게 전가된다. 대지진으로 모든 통신과 보도 수단이 마비된 암흑 속에서 공포는 유언비어라는 괴물을 길러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조선인 폭도가 습격해온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들이 독버섯처럼 퍼져 나갔다. 심지어 "쓰나미가 아카기산 기슭까지 닿았다"거나 "이즈반도가 화산 분화로 소멸했다"는 식의 지리적으로 불가능한 가짜 뉴스들이 조급한 민심을 자극했다.
이러한 허위 정보는 단순히 민간의 불안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언론과 국가 권력에 의해 공식화되며 파괴적인 무기로 격상되었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과 도쿄니치니치 신문 등 주요 언론들은 "불령선인 일파가 도처에서 봉기한다"거나 "조선인 폭도가 방화하는 모습을 기자가 목격했다"는 호외를 잇달아 내보냈다. 특히 일본 내무성 경보국장 고토 후미오는 각 지방장관에게 "조선인들이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하고 있으니 엄밀히 단속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발신함으로써 국가가 직접 혐오의 불씨를 지폈다.
경찰과 군대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다. 경시총감 아카이케 아쓰시는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계엄령 선포를 강력히 건의했고, 9월 2일부터 도쿄와 가나가와 전역에 계엄령이 실시되었다. 국가가 공인한 공포는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을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면죄부를 부여했다. 이는 곧바로 전국적으로 4,000여 개가 넘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조선인 사냥에 나서는 도덕적 타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국가가 주도하고 언론이 선동한 공포는 곧바로 민간의 손에 죽창과 일본도를 들려주었다.
3. 참혹한 현장: 자경단과 군경의 무차별 학살
자경단이라는 명칭 뒤에 숨은 학살자들은 거리마다 검문소를 세우고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한 기괴한 시험을 시행했다. 한국어에는 어두에 탁음(濁音) 발음이 없다는 점을 악용하여, 행인들에게 "15엔 50전(주고엔 고주센)"이나 "가기구게고"를 발음하게 시켰다. 발음이 매끄럽지 않거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 즉석에서 조선인으로 단정 지었다. 이 광기 어린 검문 과정에서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사투리를 쓰던 지방 출신 일본인, 심지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농아들까지 목숨을 잃었다. 도쿄농아학교 재학생 절반이 실종될 정도로 광기는 무차별적이었다.
국가 공권력은 이 기회를 틈타 눈엣가시 같던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을 제거하는 공안 사건을 획책했다.
- 아마카스 사건: 육군 헌병 대위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무정부주의자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부인 이토 노에, 그리고 불과 6살이었던 조카 다치바나 무네카즈를 강제로 끌고 가 살해한 사건이다. 어린아이까지 살해한 이 잔혹함은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인권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가메이도 사건: 육군 근위사단 소속 병력과 경찰이 노동운동 지도자 히라사와 게이시치를 포함한 13명을 가메이도 경찰서 내에서 무참히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과 중국인들 역시 함께 희생되었다.
- 혼조 사건 및 후쿠다촌 사건: 사이타마현 혼조와 지바현 후쿠다촌 등지에서 자경단이 조선인 또는 조선인으로 오인한 일본인들을 집단 린치하여 살해하는 참극이 잇따랐다.
일본 사법성은 10월 이후 보도금지를 해제하면서도 학살의 책임을 민간 자경단의 '애국심' 탓으로 돌리며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조차 황태자 결혼 기념 사면으로 석방했다. 국가가 설계하고 방조한 학살을 민간의 우발적 범죄로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광기의 심연 속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 했던 한 줄기 빛과 같은 인물이 존재했다.
4. 절망 속의 인류애: 300명의 생명을 구한 오카와 쓰네키치
보편적 인류애는 국적과 이념의 벽을 넘어서는 위대한 힘을 갖는다. 쓰루미 경찰서장 오카와 쓰네키치는 광기 어린 군중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9월 3일, 무장한 자경단 약 1,000명이 "조선인 보호소를 개방하고 그들을 내놓으라"며 경찰서를 포위했을 때, 그는 단호하게 맞섰다.
그는 자경단을 향해 "조선인에게 손을 대려거든 나부터 죽여라. 한 명이라도 넘겨줄 수 없다"고 일갈했다. 자경단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주장하자, 오카와 서장은 "그렇다면 그 우물을 가져오라. 내가 먼저 마셔보겠다"며 자경단이 가져온 1되(약 1.8리터) 병의 물을 그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켰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유언비어가 거짓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만약 수용된 조선인 중 한 명이라도 도망쳐 범죄를 저지른다면 스스로 할복하겠다는 서약까지 하며 끝내 300명의 조선인을 지켜냈다.
사건 5개월 뒤인 1924년 2월, 목숨을 구한 조선인 8명은 오카와 서장에게 한글과 한자가 혼용된 정성 어린 감사장을 보냈다. 그의 손자 오카와 유타카는 지금도 이 감사장과 함께, 조부가 '후대를 위한 기록의 증거'로 남긴 처참한 학살 현장의 사진들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국적이 무엇이든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며, 나는 경찰관으로서 당연한 도리를 했을 뿐이다"라는 오카와 서장의 생전 신념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묵직한 경종을 울린다. 개인의 용기가 생명을 구했으나, 전체적인 희생의 규모는 여전히 기록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다.
5. 통계와 진실: 가려진 희생자 수와 끝나지 않은 논쟁
간토 대학살의 피해 규모를 산출하는 과정은 단순히 숫자를 세는 작업이 아니라 사실과 은폐 사이의 치열한 역사 전쟁이다. 일본 정부는 학살 주체를 민간으로 한정하고 피해 수치를 극도로 축소해왔다.
조사 주체 | 발표 희생자 수 | 성격 및 데이터 가치 |
일본 내무성 경보국 | 231명 | 공식 발표 수치 (은폐와 축소의 산물) |
요시노 사쿠조 | 2,613명 | 일본 양심적 지식인의 학술적 정밀 조사 |
독립신문 (김승학) | 6,661명 | 대한민국 임시정부 현지 조사를 통한 기록 |
대한민국 외무부 (1959) | 수십만 명 | 외교 문서상 서술된 추정치 (상징적 수치) |
이처럼 데이터가 불일치하는 이유는 당시 일본 정부의 조직적인 방해와 기록 말살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세 가지 핵심 쟁점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 유언비어 발생원 논쟁: 유언비어가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는가, 아니면 내무성과 군부가 치안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했는가에 대한 논의다. 소스에 근거할 때 국가 기관의 조직적 가담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대학살의 성격 규정: 이를 단순한 재난 시의 소요 사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연장선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제노사이드'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 피학살자 수의 확정: 최근 이승만 정부 시절 작성된 명단에서 28명의 추가 피해자가 검증되는 등 진실 규명은 진행 중이나, 일본 정부의 비협조로 인해 미완의 숫자로 남아 있다.
이 숫자들은 통계학적 데이터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시각 아래 지워진 인간의 존엄에 대한 기록이다. 100년 전의 연기는 사라졌지만, 왜곡된 숫자는 여전히 살아있는 아픔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6. 결론: 100년의 침묵을 넘어 기억의 의무로
간토 대지진 100주년을 맞이한 현재에도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전한 침묵과 회피로 일관되고 있다. 조선인 학살을 공식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매년 열리는 추념식에 정부 주요 인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거의 비극을 '조사된 바 없다'는 논리로 부정하는 것은 역사의 시계를 1923년의 광기 속에 멈춰 세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9월 1일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수난사가 아니다. 그것은 제국주의, 차별, 그리고 혐오가 결합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 공통의 비극이자 경고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반복될지 모르는 악의 고리를 끊어내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가 오늘 이 참혹한 기록을 다시 들춰보는 이유는 6천여 조선인의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는 '혐오'가 '정의'의 탈을 쓰고 칼을 휘두르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1923년 9월 1일, 그날의 진실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부과된 엄중한 '기억의 의무'다. "오늘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되새긴 이 비극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속에 혐오에 저항하는 작은 불꽃이 되기를 바란다. 잊지 않는 한,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