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907년 9월 1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1907년 9월의 한반도는 참혹한 슬픔과 뜨거운 분노가 교차하던 공간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의 침탈 아래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고, 민족의 운명은 거센 폭풍우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망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이 시기,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와 지식인들은 안락한 삶 대신 가시밭길을 택하며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 거대한 불길의 한복판에 경상북도 영천을 근거지로 삼아 영남 항일 투쟁의 상징이 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있었고, 9월 1일은 이 의진의 두뇌이자 야전 사령관이었던 참모장 손영각이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을 마감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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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 자양댐 가에 세워진 의진 추모비 |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기록되지 않았기에 대중에게 손영각이라는 이름은 다소 생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걸었던 9월 1일의 마지막 걸음은 단순한 개인의 죽음을 넘어, 일제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한 민족의 의지가 어떻게 현장에서 실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숭고한 증거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잊힌 영웅 손영각의 삶과 그가 최후까지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다시금 재조명해야 한다. 무명의 영웅들이 바친 희생이 있었기에 망국의 역사 속에서도 민족의 정기는 꺾이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그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1907년의 처참한 시대적 배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2. 시대적 배경: 국권 피탈의 가속화와 정미의병의 불꽃
1907년은 대한제국의 주권이 사실상 해체 단계에 접어든 비극적인 해였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 삼아 7월 24일,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며 한반도의 영혼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어 같은 날 체결된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은 일제의 차관이 대한제국의 행정 각 부에 배치되어 내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치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민중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게 된 결정적인 도화선은 8월 1일에 단행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건이었다.
군대 해산은 한 국가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위권마저 박탈당했음을 의미했다.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남대문 전투를 시작으로 해산 군인들은 무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이들은 곧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훈련된 군인들과 그들이 지닌 근대식 무기가 결합하자 의병의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격렬한 무장 투쟁인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시작이다.
사료에 따르면 1907년부터 1909년 전반기까지 약 2년간 전개된 의병 투쟁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對) 일본군 전투 횟수는 약 2,700여 회에 달했으며, 투쟁에 참여한 의병의 숫자는 40,000여 명을 넘어섰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전체 인구 규모를 고려할 때 사실상 전 국민적인 항쟁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거대한 저항이었다. 일제는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 이들을 소탕하려 했으나, 조국을 되찾겠다는 열망으로 뭉친 의병들은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용해 끈질기게 맞섰다. 이러한 전 국가적 위기 속에서 경상북도 영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남의진은 영남 지역 항일 투쟁의 구심점으로 우뚝 서며 독자적인 저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 산남의진의 결성과 손영각의 역할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환직·정용기 부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 의병부대다. '산남(山南)'이라는 명칭은 문경새재 남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이 경상도 전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저항 전선을 구축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 장대한 기틀 아래서 손영각은 의진의 전략과 조직 체계를 설계하는 참모장(參謀長)이라는 핵심적인 중책을 맡았다.
손영각은 대장 정용기의 벗이자 동지로서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확정한 주역이었다.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다.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그는 의병을 규합하기 위해 '통유문(通諭文)'과 '격려문'을 직접 지어 민중의 가슴에 항일의 불씨를 지폈다. 또한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유포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나라가 처한 위태로운 현실을 알리고 구국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의 글은 날카로운 칼날보다 더 깊게 민초들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영천을 비롯해 신녕, 흥해, 청하, 기계, 죽장 등 영남 각지에 소모장을 파견하여 흩어진 의기를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산남의진의 조직 구성은 당시 사회상을 투영하면서도 이를 초월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지휘부는 정환직과 정용기 같은 유림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강한 근왕적 의식과 대의명분을 세웠으나, 실제 전투를 수행하는 병사층은 포수와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로 이루어졌다. 이는 'So What?'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조선 사회를 짓누르던 신분제와 정치·사회적 모순을 조국 수호라는 대의 아래 극복하려 했던 위대한 연대의 현장이었다. 손영각은 참모장으로서 유생의 명분과 포수들의 야성을 하나로 묶어내는 조율사 역할을 수행하며, 산남의진을 단순한 무장 집단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인 저항 공동체로 성장시켰다. 이처럼 견고한 조직의 기틀을 닦던 손영각 참모장에게 운명의 1907년 9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4. 1907년 9월의 혈전: 죽장면 매현리 전투와 손영각의 순국
1907년 4월, 산남의진은 운주산에서 진용을 재정비하며 2차 기병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이전보다 훨씬 가혹하고 체계적이었다. 조선 주둔 일본군 보병 12여단 산하 보병 14연대는 산남의진을 소탕하기 위해 영남의 산간벽지까지 촘촘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1907년 9월 초, 산남의진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 일대에서 일제와 피할 수 없는 정면 승부를 벌이게 된다.
9월 1일, 죽장면 매현리의 공기는 화약 냄새와 긴장감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신식 병기를 앞세워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유격전에도 불구하고, 기관총과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세 앞에 의병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참모장 손영각은 흔들리는 전열을 가다듬으며 대원들을 독려했다. 그는 참모장이라는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가장 위험한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매현리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변변한 갑옷 하나 없이 무명옷을 입고 화승총을 든 의병들은 근대식 군복을 입은 일본군의 총구 앞에서 육탄전으로 맞섰다. 손영각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끝까지 전선을 지키다 치명상을 입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와 구체적인 전사 정황은 사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가 죽장면 매현리의 차가운 땅 위에서 조국을 외치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불과 이틀 뒤인 9월 3일, 입암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마저 전사하며 산남의진 지휘부는 창설 이래 최대의 타격을 입었다. 손영각이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무릎 꿇지 않는 민족의 자존심과 기개였다. 그가 매현리에서 흘린 피는 의병들의 가슴속에 깊은 슬픔을 남겼으나, 동시에 굴복하지 않는 항전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핵심 지도부의 상실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산남의진의 투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승되었다.
5. 숭고한 희생의 결과: 산남의진의 계승과 역사적 의의
지도부 전사라는 절망적인 소식이 전해지자,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버지 정환직이 2대 대장을 맡아 의진을 이끌었다. 정환직 역시 12월에 체포되어 순국하는 비극을 맞이했으나, 항쟁의 불씨는 3대 대장 최세윤에게 이어졌다. 산남의진은 이후 3년 동안이나 영남 전역을 누비며 장기 항전을 이어갔다. 일제는 의병을 완전히 뿌리 뽑기 위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는 잔혹한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호남과 영남의 저항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가옥을 방화하고 양민을 학살하며, 의병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해 '폭도 도로'라 이름 붙인 길을 닦게 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손영각을 비롯한 산남의진 지도부가 보여준 저항 정신은 일제의 칼날 아래서도 소멸하지 않았다. 국내에서의 무장 항쟁이 한계에 부딪히자,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와 노령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이 간직한 전투 경험과 불굴의 정신은 훗날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항일 무장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손영각 참모장의 희생은 "비록 오늘 지더라도, 우리의 싸움은 내일의 승리를 위한 거름이 된다"는 확신을 후대 독립운동가들에게 심어주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라는 토양 위에 살고 있다. 현재 사단법인 산남의진기념사업회와 사단법인 최세윤의병대장기념사업회 등은 손영각 참모장을 비롯한 의병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잊힌 역사를 발굴하여 후세에 전하는 데 힘쓰고 있다. 1907년 9월 1일, 영남의 산야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손영각의 마지막 걸음은 단순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고민하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지식인의 고뇌이자, 억압에 맞서 자유를 꿈꿨던 인간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우리가 매년 9월의 시작점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는, 그가 지키려 했던 조국이 바로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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