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 9월 1일에 되새기는 한국 근대 문학의 상징적 인물
9월 1일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선명하고도 고독한 시적 초상을 남긴 인물, 시인 노천명(1911~1957)이 세상에 발을 디딘 날이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는 구절 하나만으로도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그는, 식민지 조선의 서정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천재적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단순히 순수 서정의 세계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9월 1일이라는 날짜가 지닌 탄생의 축복 뒤에는, 한 지식인이 시대의 압력과 개인의 야망 사이에서 어떻게 일그러져 갔는지를 보여주는 준엄한 기록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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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명(盧天命, 1911년 9월 1일~1957년 6월 16일) |
노천명의 생애는 '고고한 내면의 탐구자'에서 '파시즘의 확성기'로 급격히 변모한 궤적을 그린다. 이 극적인 변절은 현대사 연구에서 단순한 개인의 과오를 넘어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와 심미주의의 위험성을 분석하는 핵심적 사례가 된다. 그가 노래한 고결함이 어째서 가장 비천한 역사의 도구로 전락했는지, 그 비극적 모순을 파헤치기 위해 우리는 시인의 본명 '노기선'이 '노천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그 유년의 기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2. '천명(天命)'으로 다시 태어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의 성장
1911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군 순택면 비석포리에서 지주이자 무역업자인 노계일의 둘째 딸로 태어난 노기선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여섯 살 무렵 찾아온 홍역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뻔한 첫 번째 시련이었다. 20일간 고열과 혼수상태가 이어지는 사경 속에서, 아버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직접 노루를 사냥해 피를 먹였고 어머니 김홍기는 지극한 기도로 곁을 지켰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후, 가족들은 이를 '하늘이 주신 명'이라 여겨 본명 대신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이 개명 사건은 그에게 '선택받은 존재'라는 선민의식의 씨앗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읽어준 소설 《옥루몽》의 유려한 문체와 독실한 천주교 가문의 분위기는 노천명의 감수성을 형성한 자양분이었다. 191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서울로 이주한 그는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치며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다. 특히 그는 체육에 능해 달리기 선수로 활약하는 한편, 국어학의 거두 이희승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며 문학적 소양을 닦았다. 뛰어난 어휘력 덕분에 얻은 '국어사전'이라는 별명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그는 이희승 선생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내 수시로 평을 듣고 언어의 정교함을 갈고닦은 문학적 정통성을 계승한 준비된 시인이었다.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4년 졸업할 때까지, 그는 식민지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엘리트 여성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내면을 확장해 나갔다.
3.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 문학적 정점과 언론인으로서의 활동
노천명의 문단 데뷔는 화려했다. 이화여전 재학 중이던 1932년, 스승 김상용의 추천으로 〈밤의 찬미〉, 〈포구의 밤〉을 발표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졸업 후 조선중앙일보와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1938년 발간된 첫 시집 《산호림》과 그 안에 수록된 시 〈사슴〉은 그를 서정시의 독보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 먼 데 산을 바라본다"는 〈사슴〉의 구절은 당시 대중에게 강렬한 소구력을 지녔다. 비평적 시각에서 볼 때, 사슴의 고결함은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기보다 자신의 고결한 내면으로 침잠하는 '비정치적 도피주의' 혹은 '심미적 유아론(幼兒論)'의 산물이었다. 세속과 거리를 둔 채 자아를 관조하는 시인의 태도는 고립된 지식인의 자존심을 대변했지만, 이는 동시에 현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파시즘의 광풍에 얼마나 쉽게 잠식될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복선이었다.
그의 인간적 면모 역시 시 세계와 닮아 있었다. 동료 시인 김기림이 눈 오는 겨울밤 그의 집 앞까지 찾아와 구두 발자국을 남기며 구애했으나 칼같이 거절했던 일화는 그의 타협 없는 고고함을 상징한다. 또한, 당시 연인이었던 경제학자 김광진과의 뜨거웠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월북한 김광진과의 인연은 훗날 그가 겪게 될 사상적 격랑의 전초전이었다. 최정희, 모윤숙 등 당대 여류 문인들과의 교우 속에서 노천명은 점차 '향기로운 관을 쓴 높은 족속'으로서의 자아를 공고히 다져갔다.
4. '문필보국'의 이름으로 선택한 친일의 길
1941년, 일제가 대동아전쟁의 광기에 휩싸이면서 노천명의 붓은 고결한 사슴을 버리고 침략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는 단순히 시류에 떠밀린 가담자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가 배후에서 조종한 '조선문인협회'에서 노천명은 실무를 총괄하는 '간사'직을 맡았다. 야스쿠니 신사 대제일에 맞춰 결성된 이 단체는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이광수의 천황폐하 만세삼창으로 문을 열었으며, "비상시국하의 문필보국"을 노골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간사로서 강연대에 올라 여성들의 전쟁 지원을 독려했고, 용산 호국신사 근로봉사 현장에서 직접 흙을 나르며 '열혈 전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문화부 기자로서 그가 행사한 문필 권력은 이제 조선 청년들을 사지로 내모는 선동의 도구로 전락했다. 고결함을 자처하던 시인이 파시즘의 선전 기구로 전착하는 과정은, 지식인이 역사적 감수성을 상실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붕괴를 보여주었다.
5. 전쟁 지원과 여성 동원을 독려한 변절의 기록들
노천명은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전쟁 미화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특히 여성과 청년을 겨냥한 그의 수사학은 가혹할 정도로 치밀했다. 시 〈부인근로대〉에서는 군복의 탄환 자국을 보며 눈물 흘리는 여성을 꾸짖으며, 오히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라고 노래하며 인적 수탈을 정당화했다.
작품명 | 발표 시기 | 주요 내용 | 선동 논리 |
부인근로대 (시) | 1942년 3월 | 군복 수리에 동원된 여성을 찬미함 | 눈물 대신 '무운장구'를 빌며 전쟁 참여를 미화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시) | 1943년 8월 | 징병 제도 실시를 찬양함 | "나도 사나이였드면"이라는 수사로 남성 징병 압박 |
싸움하는 여성 (수필) | 1944년 10월 | 여자정신대 참여를 독려함 | 승패는 여성의 근로에 달렸으며 정신대는 유일한 길이라 주장 |
군신송 (시) | 태평양 전쟁기 | 일본군 전사자를 신격화함 | 제국주의 침략 전쟁의 희생을 숭고한 신화로 포장 |
특히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에서 사용된 "나도 사나이였드면"이라는 표현은, 여성 시인이라는 정체성을 이용해 남성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고 징병을 압박하는 극도로 위험한 선동 기법이었다. 고결한 사슴의 목소리로 읊조리던 서정은 이제 총칼보다 날카로운 살인 병기가 되어 조선의 청년들을 겨누었다.
6. 해방 이후의 삶과 '부역'의 그늘
1945년 광복은 왔으나, 노천명에게 그것은 단죄가 아닌 '선택적 망각'의 시작이었다. 서울신문과 부녀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잔류하며 또 한 번의 변절을 기록했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대회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북한군에 협력한 것이다. 9.28 수복 이후 그는 부역자 처벌법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주목할 점은 투옥 당시 그의 태도다. 그는 대통령 비서실의 김광섭에게 "거기 있으면서 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라는 오만한 명령조의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기보다 선민의식에 기반한 구명을 요구했다. 결국 모윤숙 등 동료들의 구명 운동으로 1951년 특별사면되었으나,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지식인의 이중성을 극명히 드러냈다. 1952년 발표한 소설 《오산이었다》를 통해 친북 부역 행위에 대해서는 "실수였다"고 해명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깊고 지속적이었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평생 침묵을 지켰다. 이는 철저히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만을 선택하고 기록하는 지식인의 자기합리화였다.
7. 고독한 말년과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평가
석방 이후 노천명은 공보실 촉탁, 서라벌예전 강사, 이화여대 출판부 등에서 근무하며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역사의 무게는 그의 육신을 먼저 무너뜨렸다. 1957년 재생불능성 뇌빈혈(백혈병) 진단을 받은 그는 비참한 투병 생활 속에서도 지독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동료 문인들이 모아준 치료비를 "내가 거지인 줄 아느냐"며 거절했고, 병실 벽에 원고지를 대고 잡문을 써서 병원비를 마련하려 애쓰는 처절한 모습을 보였다.
1957년 6월 16일, 그는 누하동 자택에서 45세의 나이로 고독하게 숨을 거두었다. 명동성당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화려했으나, 그가 남긴 역사의 빚은 청산되지 않았다. 사후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국가 기구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노천명 문학상'을 둘러싼 존폐 논란은, 빼어난 문학적 성취가 반민족적 행위라는 오점을 덮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의 문학은 아름다웠으나, 그 아름다움이 복무한 대상은 참혹했다.
8. 결론: 향기로운 관(冠) 뒤에 숨겨진 역사의 민낯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읊조렸던 시인은, 스스로 쓴 그 향기로운 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노천명의 일생은 지식인이 시대의 고통으로부터 고결함을 유지하려 할 때, 그 '비정치적 심미주의'가 어떻게 가장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권력에 굴종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전형이다.
그의 시어는 서정의 극치에 닿았으나, 그의 행적은 역사의 심연으로 추락했다. 9월 1일, 그의 탄생을 되새기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노천명은 묻는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은 어디까지이며, 예술은 역사의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팩트 체크를 통해 드러난 그의 명암은 우리에게 교훈을 남긴다.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잃은 재능은 결국 향기로운 독(毒)이 되어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시 구절을 기억하는 만큼, 그 구절이 전쟁터의 비명으로 바뀌었던 역사의 민낯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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