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8월 27일 목요일 오전 9시 2분, 인도양의 아름다운 섬 잔지바르의 항구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해군 군함 5척이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굉음과 함께 쏟아진 포탄은 순식간에 술탄의 목조 궁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정확히 38분 뒤인 오전 9시 40분, 불타는 궁전의 깃대에서 술탄의 붉은 깃발이 떨어져 내리며 포격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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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 후 파괴된 왕궁 |
단 38분 만에 승패가 갈린 이 충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영국-잔지바르 전쟁(Anglo-Zanzibar War)'이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과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의 민낯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사건의 전말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1. 향신료와 노예의 섬, 잔지바르와 열강의 각축
아프리카 동부 탄자니아 연안에 위치한 잔지바르(Zanzibar)는 19세기 인도양 해상 무역의 심장이었다. 전 세계 정향(Clove) 공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향신료 무역의 거점이자, 아프리카 내륙에서 끌고 온 상아와 노예가 거래되는 거대한 무역 기지였다.
1840년 오만 제국의 술탄 사이드 빈 술탄(Said bin Sultan)은 아예 수도를 아라비아반도의 무스카트에서 잔지바르의 '스톤타운'으로 이전할 정도로 이 섬의 경제적 가치는 막대했다.
- 오만 제국의 잔지바르 수도 이전(1840년) : 술탄 사이드 빈 술탄이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기고 정향 농업과 동아프리카 무역 독점망을 구축함.
-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 체결(1890년) : 영국과 독일이 아프리카 식민지 경계를 분할하며 잔지바르를 공식적인 영국의 보호국(Protectorate)으로 확정함.
- 술탄 하마드의 급사와 칼리드의 쿠데타(1896년 8월 25일) : 친영파 술탄 하마드가 급사하자 외조카 칼리드 빈 바르가시가 영국 승인 없이 궁전을 점령함.
- 영국-잔지바르 전쟁 발발(1896년 8월 27일) : 오전 9시 2분 영국 해군의 포격 개시, 38분 만인 9시 40분에 잔지바르군 항복으로 전쟁 종결.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 분할(Scramble for Africa)'이 본격화되면서 잔지바르는 영국과 독일의 치열한 세력 다툼 한복판에 놓였다. 1890년 양국은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Heligoland-Zanzibar Treaty)'을 맺었다. 영국은 북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헬골란트섬을 독일에 넘겨주는 대가로 잔지바르에 대한 배타적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이 조약으로 잔지바르는 영국의 공식적인 보호령이 되었다. 잔지바르의 술탄은 대내적 통치권을 유지했지만, 새로운 술탄이 즉위하려면 반드시 영국 총영사의 명시적 동의와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외교적 제약이 걸려 있었다.
2. 방아쇠가 된 술탄의 급사와 궁정 쿠데타
1896년 8월 25일 정오 무렵, 친영파 성향으로 영국의 정책에 순종적이던 제5대 술탄 하마드 빈 투와이니(Hamad bin Thuwaini)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스톤타운 전체에 순식간에 퍼졌다.
술탄의 숨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전임 술탄의 아들이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29세의 왕족 칼리드 빈 바르가시(Khalid bin Barghash)가 움직였다. 칼리드는 이미 1893년에도 술탄 자리를 노리고 무단 점거를 시도했다가 영국의 압박으로 물러난 전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칼리드는 즉시 무장 지지자들을 이끌고 스톤타운의 해안가에 위치한 '베이트 알 사헬(Beit al-Sahel)' 궁전을 장악한 뒤, 스스로 잔지바르의 새로운 술탄임을 선포했다.
당시 잔지바르 주재 영국 외교관이었던 총영사 대리 바질 케이브(Basil Cave)는 이 소식을 듣고 즉각 칼리드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술탄의 즉위는 대영제국 정부의 공식 승인을 거쳐야 한다. 즉시 군사를 물리고 궁전에서 퇴거하여 영국 영사관의 처분을 기다려라."
그러나 칼리드는 영국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영국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랍계 귀족들과 상인,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던 기득권층을 규합하여 결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3. 전운이 감도는 이틀간의 대치 (8월 25일~26일)
칼리드는 궁전 주변에 약 2,800~3,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들 중에는 1,000여 명의 궁전 근위대와 술탄을 지지하는 민병대, 무장 노예들이 섞여 있었다.
궁전 앞 광장과 해안 포대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과거 선물했던 17세기 청동 카로네이드 대포를 비롯해 미국산 개틀링 기관총 2문, 맥심 기관총, 독일 크루프(Krupp)제 12파운드 야포 등 수십 문의 화기가 배치되어 바다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항구에는 잔지바르 술탄의 호화 무장 요트인 'HHS 글래스고(Glasgow)'호가 정박해 있었다.
이에 맞선 영국 외교관 바질 케이브는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는 영국 해군에 긴급 타전하는 한편, 잔지바르 정부군 사령관이자 친영파 군인인 로이드 매슈스(Lloyd Mathews)장군을 통해 영국에 충성하는 잔지바르인 아스카리(Askari, 현지인 군인) 900여 명을 소집하여 영국 영사관과 외국인 거주 구역을 방어하도록 배치했다.
8월 26일, 케이프·동아프리카 함대 사령관 해리 로슨(Harry Rawson)해군 소장이 탑승한 1등 방호순양함 'HMS 세인트조지(St George)' 호를 비롯해 총 5척의 영국 군함이 잔지바르 앞바다에 집결하여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8월 26일 오후, 런던의 외무장관 솔즈베리 경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귀하가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단, 승산이 확실하지 않은 무모한 행동은 피하라."
권한을 위임받은 바질 케이브 총영사는 칼리드에게 마지막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1896년 8월 27일 오전 9시까지 술탄의 깃발을 내리고 무기를 내려놓은 뒤 궁전을 비우지 않으면, 영국 해군은 즉시 포격을 개시할 것이다."
4. 38분의 기록: 1896년 8월 27일의 분초별 전황
오전 8시 00분 – 헛된 오판
결전의 날 아침, 칼리드는 영국 영사관에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서한을 전달했다.
"우리는 깃발을 내릴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귀국이 우리에게 감히 발포할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에 바질 케이브 총영사는 역사에 남을 간결하고 서늘한 답신을 보냈다.
"우리는 포격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귀하가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히 발포할 것이다."
오전 8시 55분 – 전투 준비 완료
궁전 안에서 아무런 항복의 징후가 보이지 않자, 영국 군함 5척은 일제히 포문을 궁전과 요새로 정조준했다. 민간인 거주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군함들은 궁전 건물을 측면에서 타격할 수 있는 좁은 사격 각도를 확보했다.
오전 9시 00분 – 최후통첩 만료
운명의 오전 9시 정각이 되었으나 궁전 꼭대기의 붉은 술탄기는 여전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오전 9시 02분 – "발포하라!"
해리 로슨 제독의 명령과 함께 영국 군함 HMS 스러시, 스패로, 필로멜이 일제히 고폭탄 사격을 시작했다. 목조 골조에 석고를 발라 지어진 잔지바르의 궁전 복합단지(베이트 알 사헬, 베이트 알 후쿰)는 영국 해군의 최신 고폭 포탄을 견뎌낼 수 없었다. 포탄이 작렬할 때마다 건물 벽이 무너져 내리고 화염이 치솟았다.
오전 9시 05분 – 글래스고 호의 최후
항구에 정박해 있던 술탄의 무장 요트 '글래스고' 호가 영국 기함 세인트조지를 향해 대포를 쏘며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인트조지 호의 거대한 6인치 속사포가 불을 뿜자 글래스고 호는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고, 얕은 항구 바닥으로 침몰하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은 즉시 보트를 띄워 물에 빠진 잔지바르 수병들을 구조했다.
오전 9시 15분 – 도망친 술탄
궁전이 무너지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결사항전을 외치던 칼리드 빈 바르가시는 첫 포격이 시작된 지 15분도 되지 않아 궁전 뒷문을 통해 도주했다. 그는 소수의 측근들과 함께 인근에 위치한 독일 영사관으로 달려가 망명을 요청했다. 지도자를 잃은 수비대는 완전히 붕괴했다.
오전 9시 40분 – 깃발이 떨어지다
영국 군함의 포탄 하나가 궁전 중앙 탑에 서 있던 붉은 깃대를 명중시켜 부러뜨렸다. 술탄의 깃발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자 로슨 제독은 즉시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포격이 시작된 지 정확히 38분만이었다.
5. 전쟁의 참혹한 결과와 극단적 비대칭성
38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피해는 지극히 일방적이었다.
궁전 안팎에 밀집해 있던 잔지바르인 군사와 노예, 민간인 중 약 500여 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궁전 건물은 뼈대만 남긴 채 전소되었으며, 해안 포대와 정박해 있던 함선들은 전멸했다.
반면 영국 해군의 인명 피해는 경미했다. 군함 HMS 스러시 호에 탑승했던 영국 해군 하사관 한 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완쾌되었다. 영국군 측의 전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전쟁은 근대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기술적·군사적 우위가 봉건적 비서구 사회를 어떻게 일방적으로 제압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포함외교'의 사례다.
6. 전쟁 이후: 노예제의 종식과 칼리드의 운명
포성이 멎은 당일 오후 2시, 영국은 자신들이 지지하던 온건파 왕족 하무드 빈 무함마드(Hamoud bin Mohammed)를 잔지바르의 제6대 술탄으로 전격 즉위시켰다.
영국의 확고한 꼭두각시가 된 술탄 하무드는 영국의 요구를 전면 수용했다. 이 전쟁이 낳은 가장 중대한 역사적 진보는 바로 '동아프리카 노예제의 공식 폐지'였다. 1897년, 술탄 하무드는 영국의 강한 압박에 따라 수세기 동안 잔지바르 경제의 근간이었던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불법화하고 모든 노예를 해방하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로써 잔지바르는 술탄국의 명맥만 유지한 채 영국의 완벽한 식민 지배 체제로 흡수되었다.
한편, 독일 영사관으로 도망친 칼리드 빈 바르가시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탈출(1896년 10월) : 독일 해군 군함이 영국의 체포망을 피해 칼리드를 독일령 탕가니카(현재 탄자니아 본토) 다르에스살람으로 망명시킴.
-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에 체포(1916년) : 제1차 세계대전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이 다르에스살람을 점령하면서 칼리드를 전범으로 체포함.
- 세이셸과 세인트헬레나 유배(1917년~1925년) :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한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헬레나와 세이셸 제도로 유배 생활을 보냄.
- 몸바사에서 사망(1927년) : 영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케냐 몸바사로 돌아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60세를 일기로 사망함.
영국 정부는 칼리드의 신병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독일 영사는 법적 치외법권을 내세워 거부했다. 독일군은 항구에 군함을 바짝 대고 칼리드를 배에 태워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다르에스살람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20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1916년 영국군이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점령하면서 은신해 있던 칼리드는 마침내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배되었던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와 세이셸로 압송되어 기나긴 유배 생활을 겪어야 했다. 말년에야 아프리카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된 그는 1927년 케냐의 항구 도시 몸바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7. 38분 전쟁이 현대에 던지는 역사적 교훈
영국-잔지바르 전쟁은 오늘날 종종 해외 토픽이나 이색적인 '역사상 가장 짧은 전쟁'이라는 퀴즈 소재로 가볍게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19세기 제국주의의 비정함과 국가 간 힘의 격차가 빚어낸 비극적인 단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첫째, 맹목적 과신과 정보 부재가 낳은 파국이다.
술탄 칼리드는 영국의 강력한 군사적 의지와 최신 해군 화력을 과소평가했다. "설마 진짜로 쏘겠는가"라는 안일한 배짱과 오판은 38분 만에 5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국가의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둘째, 제국주의 포함외교의 정점을 상징한다.
영국은 단 5척의 군함과 38분간의 무차별 포격만으로 일국의 정권을 손쉽게 교체하고 자국의 식민지 지배 질서를 완벽히 관철했다. 이는 무력의 격차가 외교를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증명한 냉혹한 역사적 현장이었다.
1896년 8월 27일 잔지바르 앞바다에 울려 퍼졌던 38분간의 포성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사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과 힘을 갖추지 못한 국가가 맞이해야 했던 뼈아픈 역사의 경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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