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56년 만의 감격, 몬주익 언덕을 넘다
1992년 8월 9일은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는 날이다. 이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하계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대한민국의 황영조 선수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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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황영조 |
특히 이 승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고(故) 손기정 선수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아픔 속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목에 건 지 정확히 56년 만에, 온전한 태극기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궈낸 위대한 쾌거였다.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몬주익 언덕을 질주하며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신 황영조 선수의 감동적인 레이스와 그 속의 진실을 살펴본다.
1.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의 치열했던 42.195km
무더위와 언덕과의 사투
1992년 8월 9일 오후, 바르셀로나의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돌았고 습도까지 높아 마라톤 선수들에게는 최악의 가혹한 환경이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내로라하는 마라톤 강호들은 이 극심한 더위 속에서 체력 안배를 위해 눈치를 보며 레이스를 펼쳤다.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코스 막바지에 버티고 선 악명 높은 '몬주익 언덕'이었다. 40km 지점에 인접해 경사가 급격히 가파라지는 이 언덕은 선수들의 다리를 천근만근 무겁게 만드는 마의 구간이었다.
모리시타와의 숨 막히는 접전, 그리고 몬주익의 탈출
몬주익 언덕을 오를 때까지 선두 그룹은 황영조와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森下広一, Morishita Koichi), 그리고 독일의 스테판 프라이강 등 정예 멤버들로 좁혀져 있었다. 특히 아시아 마라톤의 라이벌로 꼽히던 일본의 모리시타와의 자존심 대결은 경기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언덕을 오르기 전까지 몸을 숨기며 체력을 비축하던 황영조는 오르막길이 시작되자마자 폭발적인 스퍼트를 올렸다. 그의 파죽지세 같은 질주에 모리시타는 물론 다른 선수들까지 속절없이 뒤로 처지기 시작했다. 몬주익 언덕 정상 부근에서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간 황영조는 폭발적인 가속도로 언덕을 완전히 내려와 올림픽 스타디움 안으로 감격적인 홀로 입성을 이루어냈다.
당당히 태극기를 품고 결승선을 통과하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선 황영조의 최종 기록은 2시간 13시간 23초(2시간 13분 23초)였다. 결승선을 통과한 그는 가슴에 새겨진 태극기를 자랑스럽게 두드리며 쓰러지듯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56년 전 베를린에서 선배 손기정이 일장기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숙여야 했던 한을, 황영조는 오롯이 대한민국의 이름과 태극마크를 빛내며 완벽하게 씻어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교민들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환호와 눈물로 그의 위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2. 황영조를 키워낸 불굴의 의지와 훈련
강원도 삼척의 바다 소년
황영조 선수가 이처럼 세계 최고 난이도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다져진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이 있었다. 강원도 삼척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 해산물을 채취하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렸고, 중학교 시절 육상(중장거리)을 시작하면서 남다른 심폐 기능과 하체 근력을 키웠다.
영원한 스승 정봉수 감독과의 만남
고교 시절을 거쳐 국민대학교에 진학한 황영조는 한국 마라톤의 전설적인 명장인 고(故) 정봉수 감독을 만나며 기량이 만개했다. 정봉수 감독은 황영조의 타고난 지구력과 투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지옥 훈련으로 악명 높은 강도 높은 로드 워크와 언덕 훈련을 반복 시켰다.
특히 몬주익 언덕과 유사한 경사로를 찾아내어 수없이 시뮬레이션 훈련을 거듭했다. 올림픽 당일 몬주익 언덕에서 경쟁자들이 맥을 못 추고 무너질 때, 황영조가 오히려 속도를 내어 치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철저하고 과학적인 지옥 훈련의 결과였다.
3. 베를린의 한을 씻다: 손기정과 황영조의 역사적 만남
56년의 시차를 뛰어넘은 바통 터치
황영조의 우승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고 손기정옹에게도 생애 가장 큰 선물이었다. 당시 손기정옹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후배 황영조의 경기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황영조가 결승선을 통과하고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손기정옹은 눈물을 흘리며 후배를 얼싸안았다. 56년 전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슬픈 시상대에 올랐던 선배가, 온전한 태극기를 단 후배의 금메달을 보며 한을 풀어낸 순간이었다. 이 만남은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가장 감동적인 세대 간의 계승으로 남아 있다.
언론이 조명한 역사적 대칭점
국내외 언론들은 일제히 베를린의 손기정과 바르셀로나의 황영조를 나란히 대서특필했다. "일제강점기의 설움을 딛고 56년 만에 대한민국이 마라톤 정상에 섰다"는 보도들은 단순한 스포츠의 승리를 넘어,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극복해 낸 민족적 쾌거로 승화되었다.
4. 올림픽 마라톤 제패 이후의 삶과 한국 마라톤에 남긴 족적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이후에도 황영조는 선수로서 끊임없이 도전했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마라톤에 출전한 그는 부상과 통증을 이겨내는 불투혼을 발휘하며 또다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모두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에 준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한 그는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 등을 역임하며 한국 마라톤의 부흥을 위해 헌신했고, 대한민국 체육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오늘날까지도 매년 개최되는 '황영조배 마라톤 대회' 등은 그의 업적을 기리고 미래의 마라톤 꿈나무들을 발굴하는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던 황영조의 거친 숨소리와 눈물은 1936년 베를린에서 시작된 대한민국 마라톤의 아픈 역사를 비로소 치유하는 구원의 메아리였다.
몬주익 언덕을 힘차게 차고 오르며 태극기를 휘날리던 그날의 모습은, 역경에 굴하지 않는 한국인 고유의 끈기와 도전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원한 역사적 표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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