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광기의 폭주가 멈춘 결정적 순간
1945년 8월 10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제2차 세계대전, 그중에서도 태평양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가장 결정적인 결정이 내려진 날이다. 이날 새벽, 끝까지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일본 제국의 수뇌부는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주재한 이른바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마침내 연합국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패망이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도 '1억 옥쇄(一億玉碎)'를 외치며 자국민과 식민지 민중을 사지로 몰아넣던 일본 군부의 광기가 처음으로 꺾인 순간이었다. 이 결정은 즉각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해 연합국 측에 타전되었고, 며칠 뒤인 8월 15일의 최종적인 항복 선언과 우리 민족의 광복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1945년 8월 10일, 그 긴박했던 심야의 지하시설에서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일본이 항복에 이르기까지의 처절하고도 끔찍했던 인과관계를 철저한 팩트에 기반하여 재구성해 본다.
1. 멸망의 전조: '결호 작전'과 1억 옥쇄의 망상
1945년 여름, 대일본제국의 운명은 이미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제해권과 제공권은 완전히 미군에게 넘어갔고, 도쿄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들은 미 육군항공대 B-29 폭격기들의 무차별 소이탄 폭격(도쿄 대공습 등)으로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오키나와마저 함락되면서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군부, 특히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육군대신과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육군참모총장을 위시한 강경파들은 결코 항복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의 본토 상륙(다운폴 작전)에 맞서 이른바 '결호 작전(決號作戰)'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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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미 고레치카(阿南 惟幾, 1887년 2월 21일- 1945년 8월 15일) |
이 작전의 핵심은 승리가 아니었다.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미군에게 엄청난 규모의 출혈을 강요하여, 미국 내 반전 여론을 자극하고 최종적으로 '조건부 강화(평화 협상)'를 이끌어낸다는 극히 망상적인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정규군뿐만 아니라 노인, 여성, 어린이까지 죽창과 사제 폭발물로 무장시키는 '국민의용전투대'를 편성했으며, 전 국민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1억 옥쇄'를 국가적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2. 파멸을 재촉한 두 번의 철퇴: 원자폭탄과 소련 참전
광기에 찬 본토 결전 준비를 무너뜨린 것은 연합군의 두 가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첫 번째 철퇴: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의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인류 최초의 실전용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했다. 단 한 발의 폭탄으로 히로시마 시가지는 증발했고, 수만 명의 인명이 즉사했다.
그러나 이 끔찍한 보고를 받은 일본 수뇌부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했다. 군부는 "미군이 신형 폭탄을 사용했을 뿐이며, 원자폭탄일 리 없다"거나 "원폭이라 해도 미군에게 남아있는 폭탄은 없을 것"이라며 사실을 축소 및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두 번째 철퇴: 8월 9일 소련의 대일 참전
히로시마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8일 심야(모스크바 시간),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인민위원은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 대사에게 선전포고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8월 9일 0시를 기해 150만 명이 넘는 소련 붉은 군대가 만주와 사할린, 북한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 수뇌부에게 원자폭탄 이상의 치명적인 심리적 타격이었다. 당시 일본은 소련이 중립을 지켜줄 것이라 맹신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소련의 중재를 통해 연합국과 유리한 강화 조약을 맺으려는 헛된 희망(소련 중재 공작)을 품고 있었다. 그 유일한 동아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던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가 본토를 위협하게 된 것이다.
3. 8월 9일의 대혼란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교착
소련 참전의 비보가 도쿄에 전해진 8월 9일 오전 10시 30분, 궁성(고쿄) 내 방공호에서는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총리의 주재로 최고전쟁지도회의(最高戰爭指導會議, 이른바 '빅 식스')가 긴급 소집되었다. 참석자는 총리, 외무대신(도고 시게노리), 육군대신(아나미 고레치카), 해군대신(요나이 미쓰마사), 육군참모총장(우메즈 요시지로), 해군군령부총장(도요다 소에무) 등 6인이었다.
회의가 한창이던 오전 11시경, 또 하나의 청천벽력 같은 보고가 날아들었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신형 폭탄(원자폭탄 '팻 맨')이 투하되었다."
두 도시가 소멸하고, 거대한 소련군이 국경을 넘은 국가 멸망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인의 최고 지도자들은 항복 조건을 두고 팽팽하게 맞서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 항복 찬성파(조건 완화파) : 스즈키 총리, 도고 외무대신, 요나이 해군대신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되, 단 하나의 조건, 즉 '천황제의 유지(국체 호지, 國體護持)'만을 요구하자"고 주장했다.
- 결사항전파(조건 강화파) : 아나미 육군대신, 우메즈 육참총장, 도요다 해군총장은 천황제 유지에 더해 세 가지 조건을 추가로 요구했다. 1) 연합군의 일본 본토 점령 반대, 2) 일본군의 자체적인 무장 해제, 3) 전범 재판의 일본 자체 실시였다.
육군을 중심으로는 이 네 가지 조건이 수용되지 않으면 차라리 1억 옥쇄를 각오하고 본토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 굽혀지지 않았다. 3대 3의 완벽한 교착 상태였다. 오후에 열린 임시 각의(국무회의)에서도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국가가 지도상에서 지워질 위기 앞에서도 군부의 아집은 통제 불능의 상태였다.
4. 8월 10일 새벽의 어전회의와 천황의 '성단(聖斷)'
각의마저 결론을 내지 못하자, 스즈키 총리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헌법상 국정의 최종 결정권자이자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천황 앞에서 회의를 열고, 천황의 입을 통해 직접 결정을 내리게 하자는 파격적인 계획이었다. 원래 어전회의는 내각과 군부가 사전에 합의한 안건을 천황이 묵인하고 추인하는 의식에 불과했으나, 스즈키 총리는 합의되지 않은 안건을 그대로 천황에게 끌고 갔다.
8월 9일 밤 11시 50분, 궁성 내 지하 방공호인 어문고(御文庫) 부속실에서 천황 히로히토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시작되었다. 자정을 넘겨 1945년 8월 10일 새벽이 된 시간이었다.
좁고 무더운 지하 벙커에서 다시 한번 격렬한 격론이 벌어졌다. 도고 외무대신이 1개 조건(국체 호지) 수락을 주장했고, 아나미 육군대신은 눈물을 흘리며 4개 조건 고수와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다.
새벽 2시경, 모든 의견을 청취한 스즈키 총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황 앞으로 나아갔다.
"신성한 결정을 내려주시옵소서."
무거운 침묵을 깨고 천황 히로히토가 입을 열었다.
"나의 의견은 외무대신의 의견(1개 조건 항복)과 같다. (...)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며, 이로써 국가를 보존하고 싶다."
히로히토는 육군이 본토 결전을 주장하지만 해안 방어 진지조차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현실을 지적하며, 전쟁을 계속하면 일본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성단(聖斷, 성스러운 결단)'이 내려진 순간이었다. 천황의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결사항전파 군인들도 더 이상 반항할 수 없었고, 회의장은 참석자들의 통곡 소리로 가득 찼다.
5. 8월 10일, 스위스와 스웨덴을 통한 공식 타전
천황의 성단이 내려진 직후인 8월 10일 아침, 일본 정부는 곧바로 각의를 열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그리고 전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스위스와 스웨덴에 주재하는 일본 공사관을 향해 긴급 전문을 타전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천황의 국가 통치 대권(국체)을 변경하는 어떠한 요구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양해하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
이 전문은 스위스와 스웨덴 정부를 거쳐 미국, 영국, 중화민국, 소련 등 연합국 4개국에 공식적으로 전달되었다. 1945년 8월 10일, 마침내 일본 제국이 국제사회를 향해 공식적으로 '백기'를 드는 절차를 밟은 것이다.
하지만 연합국, 특히 미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바인즈(James F. Byrnes)의 주도로 작성되어 8월 12일 일본에 전달된 이른바 '바인즈 회답'의 내용은 일본 군부를 다시 한번 충격에 빠뜨렸다.
"항복의 순간부터,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subject to)."
일본 군부는 '종속된다'는 표현이 천황제를 파괴하는 것이라며 격렬하게 반발했고, 다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들고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항복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다. 8월 14일, 히로히토는 다시 한번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바인즈 회답을 수락하라"는 두 번째 성단을 내렸고, 항복 조서에 공식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항복에 반대하는 하타나카 겐지 소좌 등 일부 청년 장교들이 황거를 점거하고 쿠데타를 시도한 '궁성 사건(8월 14일 밤~15일 새벽)'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수뇌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진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항복 선언이 담긴 라디오 방송(옥음방송, 玉音放送)이 전 일본과 식민지에 울려 퍼지면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마치며: 참혹한 전쟁의 끝, 그리고 찾아온 광복
1945년 8월 10일의 결정은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완전한 멸망을 막기 위한 수뇌부의 이기적인 최후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전 세계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제국주의 전쟁 기계의 전원이 마침내 뽑힌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만약 8월 10일 새벽의 그 어전회의에서 결사항전이 채택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은 계획대로 수십 발의 원자폭탄을 추가로 투하하고 '몰락 작전'을 실행하여 일본 본토를 문자 그대로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의 희생 역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늘어났을 것이 자명하다.
8월 10일 일본이 스위스를 통해 타전한 항복 의사는 어둠이 걷히고 여명이 밝아오는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인 8월 15일,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 해방의 빛이 한반도를 비추며 우리 민족은 기나긴 일제 강점기의 사슬을 끊고 '광복(光復)'을 맞이하게 된다. 8월 10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광기가 마침내 백기를 들고, 평화와 해방의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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