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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3일 목요일

[오늘의 역사] 2000년 8월 14일, 도시의 간판부터 성경의 표지까지, 현대 서예의 거목 원곡(原谷) 김기승 세상을 떠나다

1. 서론: 2000년 8월 14일, 한 시대의 필묵이 멈추다

2000년 8월 14일 오전 3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자택에서 한국 현대 서예사의 거대한 상징이었던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선생이 향년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타계는 단순히 한 예술가의 생애가 마감된 것을 넘어, 조선 시대로부터 내려온 서예의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 조형 언어로 승화시키려 했던 거대한 한 시대의 실험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구태의연한 '박제된 전통'으로서의 서예를 거부하고, 도시의 활력과 현대인의 체취가 담긴 살아있는 예술로서의 서체를 갈구했던 혁신가였다.

김기승(金基昇, 1909년 ~ 2000년 8월 14일)
김기승(金基昇, 1909년 ~ 2000년 8월 14일)

김기승은 생전 "한국적 향기와 한국인의 체취를 풍기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온몸을 혹사했다"라고 회고했을 만큼, 민족적 정체성을 현대적 서법으로 구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유산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깊은 수장고부터 국가적 성지인 국립묘지의 비문,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교회의 간판과 성경 표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 전반에 깊고 넓게 각인되어 있다. 원곡의 삶과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그가 붓을 들기 시작한 학문적 배경과 초기 생애를 먼저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원곡 김기승의 생애와 학문적 여정: 충남 부여에서 상하이까지

원곡의 예술 세계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은 그가 지녔던 탄탄한 지적 기초와 국제적인 식견이다. 1909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서당 교육을 통해 천자문과 사서삼경을 익히며 전통적인 한학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그의 행보는 전통적 선비의 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공학대학부 경제과를 졸업했는데, 이러한 독특한 학문적 배경은 그가 서예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객관적 조형 예술이자 인문학적 성찰의 결과물로 바라보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

1946년, 당대 서예의 최고 권위자였던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문하에 입문한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스승으로부터 소전체의 정수를 흡수하면서도, 그는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에도 충실했다. 1947년부터 대화약품 대표를 맡아 경영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부인 차인실 씨와의 사이에 장남 김명호(의사), 사위 김성재(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등 당대 사회 지도층과 연결된 견고한 가계 구조를 형성했다. 이는 원곡이 단순한 서예가를 넘어 한국 근현대사에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실력 또한 압도적이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시작으로 제4회까지 연달아 특선을 차지하며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국전 추천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문교부 문화재보존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서단(書壇)의 중심에 섰다. 탄탄한 학문적 기초와 스승의 가르침, 그리고 사회적 위치를 기반으로 원곡은 마침내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 세계인 '원곡체'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3. 예술적 혁신 I : '원곡체(原谷體)', 도시의 일상이 된 서체

원곡 김기승의 가장 변별적인 성취는 자신의 호를 딴 '원곡체'를 통해 서예를 대중의 삶 속으로 불러들인 점이다. 원곡체는 전통적인 서법의 엄격함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가독성과 조형미를 극대화한 서체다. 특히 붓을 멈추지 않고 과감하게 휘두르며 끊어질 듯하면서도 맥락이 이어지는 '대담낙필(大膽落筆)'의 기법은 글씨에 생동감 넘치는 리듬과 현대적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원곡체의 형성 과정은 그의 끊임없는 자기 혁신의 역사를 대변하며, 이를 단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계기간(연대 추정)주요 특징 및 발전 내용
자습기1909~1936서당 교육을 통해 한학과 서법의 기초를 독학하며 문자와의 인연을 맺음
학서기1937~1957소전 손재형의 문하에서 스승의 독특한 '소전체'를 집중 학습하고 수용함
실험기1950년대 후반~구양순, 안진경, 황정견 등 중국 대가들의 필법을 섭렵하며 독자적 서법을 모색함
완성기1960년대 이후굵고 가는 점획의 대비와 음양 조화를 통해 대중성과 예술성을 갖춘 '원곡체' 확립

원곡체는 예술의전당 전시실의 문턱을 넘어 우리 도시 경관의 일부가 되었다. 성경 전서의 표지 글씨부터 새문안교회의 간판, 심지어 일반 식당의 상호에 이르기까지 이 서체가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굵고 가는 점획의 대비가 주는 시각적 명료함과 그 안에 깃든 서민적인 친근함 덕분이다. 그러나 원곡은 이러한 조형적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먹의 농담을 통해 서예를 회화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4. 예술적 혁신 II : '묵영(墨映)'과 전통의 현대적 변용

원곡은 서예계의 원로가 된 이후에도 '묵영(墨映)'이라는 전위적인 기법을 창안하여 서단의 보수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묵영은 청묵(靑墨)의 번짐을 활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시각적·회화적 서예'를 일컫는다. 그는 상형문자 등을 여러 번 겹쳐 그려 넣음으로써 평면적인 글씨에 심오한 공간감과 회화적 깊이를 부여했다.

이러한 실험은 당시 서예계에 거센 풍파를 일으켰다. 일중(一中) 김충현을 비롯한 보수 서단은 묵영을 두고 '서구 추상미술의 아류'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전통의 법도에서 벗어난 파격이라는 비판이었다. 하지만 원곡은 "새로운 조형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 곧 전통을 수호하는 길"이라는 확고한 논리로 응전했다. 그에게 전통이란 단순히 과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는 시대적 공기 속에서 끊임없이 변용되어야 하는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곡의 철학은 서예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당대 미술사의 당당한 한 축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이론적 기틀이 되었다.

여기서 전문가의 시선으로 원곡의 작품을 냉정하게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기도(전서)>는 원곡의 예술적 실험이 가진 고뇌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묵직한 전서체로 '기도'를 쓰고 좌측 상단에 한글로 문장을 곁들였으나, 사실 전서와 한글의 조형적 조화 측면에서는 다소 어색한 긴장감이 감돈다. 특히 관지를 생략하고 필획과 맞물려 찍은 낙관의 위치는 원곡이 전통적 구도에서 얼마나 벗어나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실험의 과정에서 나타난 파격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비평적 관점은 원곡을 신화화된 거목이 아닌, 인간적인 고뇌를 가진 예술가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5. 이론과 실기의 병행: 『한국서예사』의 금자탑

원곡 김기승이 현대 서예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학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평생 33차례 이상의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도, 우리 서예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물인 **『한국서예사(韓國書道史)』**는 한국 서예 연구자들에게 지침서이자 나침반과 같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저술을 통해 한국 서예가 중국의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미학 체계와 역사적 흐름을 지니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했다. "한국적 정취를 드러내기 위해 온몸을 혹사했다"는 그의 고백은 붓을 든 손뿐만 아니라, 역사를 파헤친 그의 펜 끝에서도 증명된다. 이론적 토대가 없는 창작은 공허하고, 창작이 없는 이론은 관념적이라는 사실을 그는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학문적 업적은 그가 창안한 '원곡체'와 '묵영'이 단순한 기교의 산물이 아닌, 깊은 역사적 성찰의 결과물임을 뒷받침한다.

6. 역사의 새겨진 필적: 주요 작품과 사회적 기여

원곡의 필적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기록한 역사의 증언자다. 그의 글씨가 국가적 기념비와 문화유산 곳곳에 새겨진 것은 그의 서체가 가진 강인한 민족적 기개와 현대적 세련미가 국가의 상징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주요 금석문 및 기념비적 유산

  • 안창호 선생 비문: 도산의 숭고한 정신을 장엄한 필치로 기록함
  • 안중근 의사 동상문: 의사의 강직한 기개와 민족적 자긍심을 형상화함
  • 국립묘지 무명용사 영현예병서: 이름 없는 영웅들의 넋을 기리는 경건한 기록
  • 민충정공 비두전: 민영환 선생의 절개와 충절을 전서체(篆書體)의 묵직한 힘으로 표현함

특히 1956년 작인 보물 제1709호 수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편액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래 정조 시대 참판 조윤형(松下翁)의 글씨가 걸려 있던 이곳에 원곡의 편액이 새로 걸린 것은, 서예가 시대를 관통하며 어떻게 연속성을 갖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조윤형의 글씨가 조선 후기의 풍류를 담았다면, 원곡의 글씨는 전후(戰後) 복구 시기의 강인한 의지와 현대적 필세를 담아내며 전통 건축물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는 1955년 대성서예원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했으며, 1978년에는 '원곡서예상'을 제정하여 서예계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 상은 2000년 그가 타계한 후 원곡문화재단을 통해 '원곡서예문화상'과 '원곡서예학술상'으로 분화·계승되었다. 강대희, 이필숙 등 수많은 중진 작가와 학자들이 이 상을 거쳐 가며 한국 서예의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은 원곡이 남긴 교육적·사회적 유산의 깊이를 증명한다.

7. 결론: 원곡 김기승이 현대인에게 남긴 질문

원곡 김기승은 서예를 과거의 전유물에서 해방시켜 현대라는 광장으로 끌어낸 '혁신적 전통주의자'였다. 그는 경제학적 식견으로 예술을 조망했고, 기업 경영의 사회적 경험을 예술적 자산으로 삼았으며, 무엇보다 서예라는 장르에 '한국인의 체취'를 담기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 그의 타계 이후에도 원곡문화재단을 통해 이어지는 학술 세미나와 전시회는 그가 남긴 묵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보았듯, 원곡의 서체는 디지털 시대의 폰트로 재탄생하여 우리 도시의 거리 곳곳을 수놓고 있다. 이는 예술이 대중과 호흡할 때 진정한 생명력을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원곡 김기승이 남긴 7,000자에 가까운 방대한 예술 궤적은 우리에게 묻는다. "전통을 박제할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을 것인가?" 그가 남긴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필획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기개와 향기를 품은 채, 현대 서예가 나아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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