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부: 1989년 8월 14일, 한 시대의 종언
1989년 8월 14일, 한국 사학계의 거대한 별이자 가장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두계(斗溪) 이병도(1896~1989)가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가 숨을 거둔 날은 그가 태어난 지 정확히 93년이 되는 생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원로 학자 한 명의 퇴장을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학의 방법론과 인적 계보를 독점해 온 ‘두계 시대’의 상징적 종언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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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도(李丙燾,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1989년 8월 14일) |
이병도는 생전 한국 사학계의 ‘태두(泰斗)’로 추앙받으며 현대 역사학의 기틀을 닦았다는 찬사를 받았으나, 동시에 ‘식민사학의 학문적 후계자’라는 무거운 비판을 동시에 짊어진 인물이다. 그는 문헌과 사료에 근거한 실증주의를 통해 한국학의 과학화를 이끌었으나, 그가 정립한 역사관이 한국사의 공간적 범위를 한반도 내로 한정시켰다는 ‘반도사관’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학계와 대중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본 칼럼에서는 그의 삶과 학문적 계보를 추적하며, 그가 남긴 유산의 빛과 그림자를 당시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출생과 성장: 신구 학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병도는 1896년 경기도 용인에서 충청수사 이봉구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우봉 이씨 가문은 고려 시대 문하시중 이공정을 시조로 하고, 조선 시대 판서를 지낸 농재공 이익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그는 10대 중반까지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문 공부에 매진하며 ‘구식 박사’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 전환점은 15세에 이루어진 부인 조남숙과의 결혼이었다. 구한말 무관 조성근의 딸이었던 부인은 진명학교에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운 신여성이었다. 한학에 침잠해 있던 이병도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춘 부인과 신식 공부를 하던 처남 조백현(후일 학술원 회원)의 모습에 깊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그가 상투를 튼 채 가족 몰래 보광학교와 중동학교를 다니며 신학문을 접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유교적 고전 문헌에 능통한 전통적 소양과 서구적 합리성을 갈구하는 근대적 지성이 그의 내면에서 교차하기 시작한 것이다.
3. 학문적 행로의 결정: 와세다 대학과 한국사 연구의 시작
1915년 보성전문 법률과를 졸업한 이병도는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 진학했다. 당초 그의 목표는 서양사 전공이었으나, 일본 사학계의 대가 요시다 도고의 저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접하며 운명적인 경로 수정을 하게 된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왜곡된 한국사의 실체를 목도한 그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사 정립’이라는 민족적 소명감을 품게 되었다.
이 시기 그가 전수받은 학문적 계보는 랑케(Ranke)로부터 시작된 근대 역사주의와 실증주의였다. 랑케의 제자 루드비히 리스(Ludwig Riess)가 도쿄 제국대학에 이식한 이 학풍은 사료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객관적 사실의 파악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이병도는 요시다 도고와 쓰다 소우기치 등으로부터 사실을 개별적이고 고유한 존재로 파악하는 ‘개성기술적 개별과학’으로서의 사학을 학습했다. 이는 훗날 그가 감정적 호소에 치중하던 계몽주의 사학이나 법칙을 강요하는 사회경제 사학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실(Fact)을 통해 민족의 실체를 증명하려는 ‘실증주의 이념’을 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4. 빛과 그림자: 조선사편수회 참여와 청구학회의 그림자
귀국 후 이병도의 행적 중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수사관보 임명과 그에 이은 활동이다. 그는 이곳에서 약 22개월간 근무하며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함께 『조선사』의 신라통일 이전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편찬을 담당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규장각의 방대한 사료에 접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기도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 등 비판적 시각에서는 그가 한국사를 한반도 남부로 국한한 이마니시 류의 고조선 부정론에 가세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1930년 그가 참여한 청구학회(靑丘學會)다. 이 단체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들과 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되었는데, 이병도는 여기서 위원을 지내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청구학회는 표면적으로 극동 문화 연구를 내걸었으나, 실상은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대륙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사와 만주사를 연결하는 이른바 ‘만선사(滿鮮史)’ 체계를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진단학회가 지향한 민족적 자율성과는 정반대의 궤적에 있는 활동이었다.
5. 한국학의 독립선언: 진단학회 창립과 실증주의의 이념화
1934년, 이병도는 관제 사학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국인 학자들을 결집하여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했다. 학회명에 담긴 ‘진(震)’과 ‘단(檀)’은 동방의 나라와 단군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일본의 황국사관에 맞선 학문적 독립 선언이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우리말로 된 최초의 학술지인 『진단학보』를 발행했다.
이 시기 이병도의 실증주의는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과학적 엄밀성을 무기로 민족의 실체를 입증하려는 ‘민족사 정립의 도구’로 변모했다. 그는 「삼한문제의 신고찰」과 「지리도참사상」 연구 등을 통해, 문헌 증거가 부족한 영역에서도 역사의 내적 논리를 추적하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홍종욱 교수의 분석처럼, 그의 실증사학은 랑케의 ‘지도이념(leitende Idee)’을 수용하여 사실 파악과 민족적 가치 판단을 결합한 형태였다. 이는 일제가 한국사를 ‘정체된 역사’로 규정하려 할 때, 사료 비판이라는 서구적 칼날을 역이용해 그들의 논리를 깨부수려 했던 학문적 항쟁의 실체였다.
6. 해방 후 국가 기틀 확립: 서울대 창설과 '교수 내각'
1945년 해방은 이병도에게 학문적 자유와 행정적 책임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창설을 주도하며 초대 주임교수로서 현대 사학의 교육 체계를 설계했다.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부산으로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등 규장각의 핵심 도서들을 안전하게 소개해 지켜낸 것은 우리 문화유산 보호사에 남을 위대한 업적이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출범한 과도내각에서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그는 교육의 민주화에 앞장섰다. 당시 그는 학생들을 통제하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차관에 이항녕 교수, 편수국장에 전해종 교수, 과학교육국장에 최상업 교수 등 당대 최고의 석학들을 대거 중용하여 이른바 ‘교수 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교육의 전문성을 지키려 했던 그의 신념이 반영된 조치였다.
7. 학문적 금자탑과 '두계 인맥'의 명암
이병도는 90세에 출간한 『한국유학사략』을 비롯하여 『한국사대관』, 『고려시대의 연구』 등 1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한국사의 표준을 제시하며 학문의 권위를 세웠으나, 그의 제자들이 한국 사학계의 주요 보직을 독점하면서 ‘두계 인맥’이라는 거대한 학술적 카르텔을 형성했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전해종, 고병익, 이기백, 한우근, 이태진 등 그로부터 배운 학자들은 현대 한국 사학의 중추가 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다른 학문적 시각(민족주의 사학 등)과의 소통을 저해하는 장벽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가문은 현대 한국 사회의 핵심 엘리트 층을 형성했다. 장남 이기녕(서울대 의대 교수), 차남 이춘녕(서울대 농대 학장)을 비롯하여 손자인 이장무(전 서울대 총장), 이건무(전 국립중앙박물관장), 그리고 사위인 민헌기(전 대통령 주치의)에 이르기까지, 이병도의 가계는 한국 인문·과학·행정계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문화적 자산이자 권력으로 자리 잡았다.
8. 종합 평가: 실증(實證)이라는 이름의 유산과 과제
이병도의 삶은 랑케가 주창한 “사실을 사실대로 밝힌다”는 금언을 한국적 토양에 심기 위한 90년의 여정이었다. 그의 실증주의는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 역사학이 정치적 선동이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일제 관제 사학에서 습득한 ‘반도 중심적 시각’과 학문적 편향성은 후대 학자들에게 극복해야 할 무거운 과제로 남겨졌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식민사학의 온상’이라는 비판과 ‘한국 사학의 아버지’라는 찬사 사이에서 여전히 평행선을 달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남긴 치밀한 사료 고증의 성과와 학문적 엄격함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 사학이 과학적 체계를 갖추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이병도라는 인물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기보다, 그가 마주했던 시대적 한계와 그 속에서 꽃피운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직시해야 한다. 거목은 쓰러졌으나 그가 남긴 ‘실증’이라는 도구는 여전히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날카로운 안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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