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8월 10일은 구한말 격동의 시기,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을 위해 순한글로 발행된 민족지 '제국신문(帝國新聞)'이 옥파 이종일(玉坡 李鍾一)에 의해 창간된 날이다. 대한제국 시기는 외세의 침탈이 본격화되고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던 혼란의 시대였으나, 동시에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고 근대적 국가로 발돋움하려는 자강의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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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일(李種一, 1858년 12월 10일(음력 11월 6일) ~ 1925년 8월 31일) |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탄생한 제국신문은 지식인이나 양반층이 아닌 철저히 '민중'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언론이었다. 어려운 한문 대신 누구나 읽기 쉬운 순한글을 채택하여 여성과 서민층의 정치적, 사회적 각성을 이끌어낸 제국신문의 창간은 한국 언론사뿐만 아니라 민중 운동사 및 여성 운동사에서도 지대한 의미를 지닌다. 1898년 8월 10일 창간부터 1910년 강제 폐간에 이르기까지, 가시밭길을 걸으며 민족의 정론지로 활약했던 제국신문의 발자취를 깊이 있게 조명해 본다.
1. 1898년, 격동의 대한제국과 근대 언론의 태동
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하며 자주독립 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열강의 이권 침탈은 날로 심해졌고,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에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협회가 결성되고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는 등, 민중의 힘으로 외세를 배격하고 근대화를 이루려는 자각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1896년 창간된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은 이러한 민중 계몽의 기수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독립신문 하나만으로는 전국적으로 폭발하는 민중의 정치적 욕구와 정보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에 부족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외세의 침략을 비판하며, 정부의 부패를 감시할 더 많은 민족 언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898년에는 걸출한 두 개의 민족지가 탄생하게 되는데, 하나는 지식인층을 겨냥한 국한문 혼용체의 '황성신문(皇城新聞)'이었고, 다른 하나가 바로 서민과 부녀자를 위한 순한글 신문 '제국신문'이었다.
2. 옥파 이종일의 헌신과 제국신문의 탄생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이끌어간 핵심 인물은 옥파 이종일이다. 그는 훗날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하고 배포했던 굳건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이종일은 개화파 지식인으로서 국가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의 민중, 그중에서도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서민층과 여성들이 깨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굳게 믿었다.
1898년 8월 10일, 이종일은 이승만(초대 대통령), 유영석, 이종문 등과 함께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초기에는 이승만이 주필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이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에는 이종일이 사장이자 주필로서 신문의 모든 것을 도맡아 이끌었다. 제국신문은 당시 황성신문과 인쇄 시설을 공유하는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발했지만, 민중을 계몽하겠다는 창간 의지만은 그 어느 신문보다 확고했다.
3. 순한글 간행의 혁명, 서민과 여성의 눈을 띄우다
제국신문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하게 '순한글(국문)' 전용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한문을 숭상하는 기조가 강했고, 신문이나 공문서 역시 한문이나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창간된 황성신문이 유림과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국한문 혼용을 채택한 것과 뚜렷이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종일이 순한글을 고집한 이유는 명확했다. 학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일반 평민과 부녀자들도 쉽게 신문을 읽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창간호 논설에서 제국신문은 "우리나라 남녀 상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보게 하기 위해 언문(한글)으로 인쇄한다"고 천명했다.
이러한 전략은 적중했다. 제국신문은 '암클'이라 조롱받던 한글의 위상을 국문(國文)으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으며,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시장의 상인들, 규방의 아녀자들은 제국신문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근대적 인권 의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신문은 그들에게 세상을 보는 창이자 새로운 지식의 교과서였다.
4. 여성 인권 신장과 남녀평등 사상의 선봉장
제국신문의 역사적 공로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여성 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조선 시대 내내 억압받고 사회 참여가 제한되었던 여성들에게, 제국신문은 든든한 대변인이자 멘토였다. 제국신문은 논설을 통해 남존여비 사상을 강력히 비판하고,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역설했다.
신문은 "부인들도 남자와 같이 학문을 배워 독립 생애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지식과 능력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실제로 제국신문은 여학교 설립 운동을 지지하고, 여성 독자들이 직접 투고한 글을 적극적으로 게재하여 여성들의 목소리를 사회 여론으로 공론화했다.
이러한 노력은 1898년 9월, 한국 최초의 여성 인권 선언문인 '여권통문(女權通文)'이 발표되고 최초의 여성 단체인 찬양회(贊襄會)가 결성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제국신문은 여성들에게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를 넘어, 인권 의식을 일깨우고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5. 외세 배격과 부정부패 척결을 향한 꼿꼿한 정론
제국신문은 서민과 여성을 주 독자층으로 삼았다고 해서 그 내용이 결코 가볍거나 연성(軟性)적인 것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언론보다 날카로운 필봉으로 열강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 등 외세의 부당한 압력이 있을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이를 비판하고 민중의 저항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를 성토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신문은 관료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근대적 법치주의의 확립을 요구했다. 독자들은 제국신문이 쏟아내는 서슬 퍼런 비판 기사를 읽으며 정치적 주체로서의 자각을 키워나갔다. 이처럼 제국신문은 대중적인 언어(순한글)를 사용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사상적 무게와 정치적 선명성은 당대 최고의 수준을 유지했다.
6. 끝없는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민중의 애환
위대한 족적을 남긴 제국신문이었지만, 그 운영 과정은 눈물겨운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주 독자층이 경제력이 부족한 서민과 부녀자였기 때문에 신문 대금을 제때 수금하기 어려웠고, 광고 수입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지만, 이종일 사장은 가산을 탕진해가며 신문 발행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집을 팔고 빚을 내면서까지 윤전기를 돌리는 이종일의 헌신은 처절할 정도였다.
신문이 폐간 위기에 처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제국신문을 잃을 수 없었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장 상인들은 쌈짓돈을 털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빼서 의연금(기부금)으로 냈다. 제국신문은 단순한 사기업을 넘어 민중이 직접 지켜내는 '그들만의 언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정난보다 더 큰 위협은 일제의 탄압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면서 언론에 대한 검열은 극도로 흉포해졌다. 1907년 '신문지법(新聞紙法)'이 제정되면서 제국신문은 수시로 기사가 삭제되고 정간 조치를 당하는 등 끔찍한 탄압에 직면했다. 항일 기사가 실린 지면은 일제에 의해 압수되거나 활자가 깎여나가 공란(벽돌장)으로 발행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이종일 역시 수차례 투옥되고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7. 민중의 가슴에 묻힌 제국신문의 찬란한 유산
제국신문은 끈질긴 일제의 탄압과 살인적인 재정고 속에서도 무려 12년 동안 버티며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이른바 경술국치(한일병합)로 대한제국이 완전히 멸망하면서 제국신문 역시 그해 8월 2일을 마지막으로 지령 제3241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의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무단통치를 시작한 일제는 조선의 민족 언론을 단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압살해 버렸다.
비록 신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1898년 8월 10일에 시작된 제국신문의 찬란한 발자취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제국신문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한글을 대중화하여 근대 국어 발전에 기여한 기념비적인 매체다. 또한, 양반 사대부 중심의 구시대적 질서를 타파하고 서민과 여성을 역사의 주체로 호명한 최초의 대중 언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평등 사상,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글 전용의 문화는 120여 년 전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순한글 신문을 찍어내며 민중의 눈과 귀를 열어주었던 제국신문과 옥파 이종일의 숭고한 희생 위에 서 있다. 8월 10일 제국신문 창간일을 맞아, 권력이 아닌 철저히 약자와 민중의 편에 섰던 진정한 '민족 정론지'의 꼿꼿한 기상을 다시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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