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23일 오후 2시 15분경,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 도로는 귀를 찢는 듯한 폭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인천에서 탈취한 시외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진격하던 한 무리의 군인들이 육군 제30사단 등 군경 저지선에 막히자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단면이자 수십 년간 국가 기밀이라는 장막 뒤에 은폐되었던 '실미도 사건'이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특수부대원들의 난동이 아니라, 냉전의 산물로 태어난 이들이 국가로부터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끝에 선택한 비극적인 항거였다. 본 기록가는 '오늘의 역사' 시리즈를 통해 공군 제2325부대 209파견대, 이른바 '684부대'의 창설부터 대방동의 폭음,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진실 규명의 과정을 객관적인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국가 권력이 정권 안보를 위해 개인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는지, 그 가려진 진실을 밝히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책무이다. 1968년 1월의 한반도로 돌아가 이 비극의 시작점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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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한겨레신문 |
1. 탄생의 배경: 1.21 사태와 김일성 암살 계획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산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인근 500m 지점까지 침투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생포된 김신조가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라고 발언하자 박정희 정권은 극도로 분노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 조치로 정권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대칭적 특수부대 창설을 명령했다.
1968년 4월 1일, 중앙정보부의 주도하에 공군 산하에 684부대(공식 명칭 제2325부대 209파견대)가 창설되었다. 부대 명칭인 '684'는 창설 연도와 달을 딴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인천 무의도 인근의 무인도인 실미도에 비밀 기지를 구축하고, 북한 침투를 위한 공작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거대한 기만극을 벌였다. 모집관들은 서울 양동 사창가, 남영동 굴다리 인근 노동자 합숙소, 녹십자 혈액원 등을 돌며 신체 조건이 좋은 실직 청년이나 소위 '깡다구' 있는 하층민들을 물색했다. 이들에게는 "장교 임용", "베트남 파병 및 목돈 마련"과 같은 장밋빛 약속이 주어졌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군번조차 부여받지 못한 불법적인 민간인 신분이었으며,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구호 아래 기본권이 완전히 박탈된 소모품으로 취급되었다.
구분 | 북한 124군부대 | 남한 684부대 (209파견대) |
창설 주체 |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및 공군 |
창설 목적 | 박정희 대통령 암살 및 남한 교란 | 김일성 주석 암살 및 1.21 사태 보복 |
구성 인원 | 31명 (정예 군인) | 31명 (민간인 모집 공작원) |
공식 신분 | 특수 공작원 군인 | 군번 없는 민간인 공작원 |
최종 행보 | 청와대 습격 시도 후 대부분 사살 | 실미도 탈출 후 대방동 자폭 및 사형 |
이들은 국가의 복수를 위해 급조된 칼날이었으나, 그 칼끝은 결국 자신들을 쥐고 있던 국가를 향하게 된다.
2. 실미도의 3년 4개월: 가혹한 훈련과 무너진 인권
실미도에 격리된 31명의 대원은 3년 4개월 동안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비인도적인 고문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견뎌야 했다. 훈련은 단순한 군사 교육을 넘어선 생존 투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대원들이 장애물을 통과하는 동안 발뒤꿈치를 조준하여 기관총 사격을 가하거나, 무장 상태에서 무리한 해상 수영을 강요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 행위가 일상화되었다.
실제로 훈련 과정에서 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 사유를 면밀히 살펴보면 국가 권력이 얼마나 잔혹하게 인권을 유린했는지 알 수 있다.
훈련 기간 중 사망 대원(7명) 기록 상세
- 익사 및 피로사 (2명): 중무장 수영 훈련 중 한 대원이 기력이 다해 물 밖으로 나오려 하자, 기간병이 "때려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다시 밀어 넣었고 결국 익사했다.
- 탈영 시도 및 처형 (2명): 실미도를 탈출하려다 붙잡힌 대원들은 동료들의 손에 의해 몽둥이로 맞아 죽는 처형을 당했다.
- 민간인 대상 범죄 및 자결 (3명): 1970년 11월, 가혹 행위를 견디지 못해 무의도로 탈출한 3명의 대원이 민간인을 인질로 잡고 대치하다가 전원 자결했다.
특히 처형된 대원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은 인륜을 저버린 수준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처형된 시신을 드럼통에 넣어 디젤 기름으로 튀기거나 칼로 훼손하여 소각하는 등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하는 행위가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된 애국자가 아니라, 고립된 섬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서서히 미쳐가던 피해자들이었다.
3. 버려진 공작원들: 데탕트의 파도와 국가의 배신
1970년대 초, 국제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닉슨 독트린 발표와 미-중 관계 개선, 그리고 남북 적십자 회담으로 대표되는 '데탕트(긴장 완화)'의 물결은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했던 684부대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이들은 이제 북한과의 대화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해서는 안 될 '유령'이자 제거해야 할 '오점'으로 전락했다.
국가의 배신은 보급 상황의 악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에서 이후락으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부대 예산은 착복되었고 공작원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부식비마저 중간에서 횡령되었다. 대원들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려 산에서 뱀을 잡아먹거나 기간병들이 키우던 개와 돼지의 밥을 훔쳐 먹으며 연명해야 했다. 훈련병들은 기간병의 빨래를 해주고 라면 한 봉지를 얻어먹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심리적 공포였다. 부대원들 사이에서는 "국가 기밀 유지를 위해 우리 모두를 몰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보안을 명분으로 자신들을 폐기하려 한다는 소문은 대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전문 분석가들은 이를 '국가에 의한 시민 도구화의 전형적인 말로'라고 규정한다. 필요할 때는 시민의 목숨을 징발하고, 필요가 없어지자 그 존재를 지우기 위해 사지로 몰아넣은 명백한 국가 범죄였다. 결국 1971년 8월 23일 새벽, 더 이상 앉아서 죽을 수 없다고 판단한 대원들은 대통령과의 직접 담판을 위해 섬을 탈출하는 반란을 선택하게 된다.
4. 8월 23일의 기록: 섬에서의 반란과 대방동의 폭음
1971년 8월 23일 새벽 6시경, 24명의 생존 대원들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이들은 교육대장을 포함한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장악했다. 당시 출장 중이던 김방일 소대장과 숲속 혹은 화장실에 숨어 있던 기간병 6명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섬을 빠져나온 대원들은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하여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을 열기 위해 전략적인 이동을 시작했다.
사건 당일 타임라인 재구성
- 06:00: 기간병 살해 및 실미도 장악. 교전 중 대원 1명 사망.
- 12:00: 인천 옥골(현 옥련동) 해안 상륙 후 태화상운 소속 시외버스(신진 FB100L 모델) 탈취.
- 12:10~13:30: 인천 조개고개를 지나 부천, 소사, 오류동을 거쳐 서울 진입. 육군 제33사단 저지선과 치열한 교전 발생. 조개고개에서 대원 3명(심보길, 김기정, 전영관) 전사.
- 14:15: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 도착. 타이어가 펑크 나고 엔진이 멈춘 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으며 정차. 육군 제30사단 등 압도적인 군경 병력에 포위.
- 14:20: 더 이상 퇴로가 없음을 직감한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 수류탄 자폭 감행.
대방동 현장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자폭으로 인해 대원 20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치명상을 입었으며, 민간인 6명과 경찰 2명이 교전 및 폭발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버스 기사의 증언에 따르면 대원들은 죽기 직전 "우리는 무장공비가 아니다", "정부가 우리를 죽이려 했다", "박정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절규했다. 이들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자신들을 유령으로 만든 국가 권력의 정점에 항의하려 했던 비극적인 부나비들이었다.
5. 끝나지 않은 비극: 은폐된 진실과 남겨진 과제
사건 직후 정권은 철저한 정보 통제와 왜곡 발표에 나섰다. 최초 발표에서는 이들을 '무장공비'라고 규정했다가, 하루 만에 '군 특수범'으로 말을 바꾸며 부대의 실체를 숨기려 했다. 그러나 신민당 이세규 의원의 폭로로 이들이 공군 산하 특수부대원임이 밝혀졌고, 이세규 의원은 이후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 했다.
현장에서 생존한 4명의 대원(임성빈, 김병엽, 김창구, 이서천)에게 가해진 국가의 기만은 더욱 악랄했다. 군사재판 과정에서 군 관계자들은 "상소를 포기하고 침묵하면 베트남 전쟁에 보내주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이들의 입을 막았다. 대원들은 이 약속을 믿고 법정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국가 기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국가는 1972년 3월 10일 오전, 이들에 대한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생존 대원 4인의 마지막 유언
- 김병엽: "국가에 대해 말도 못 하고 죽어가는 게 아깝다. 내 죽음을 집에 알리지 말아달라."
- 임성빈: "바다 한복판 섬에서 부모도 못 부르고 3년을 지냈다.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 김창구: "어린 3남매가 제일 불쌍하다. 정말 보고 싶다."
- 이서천: "애국가를 부르며...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것이 억울하다."
사형 집행 후 국가는 유족들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시신을 오류동 인근에 암매장했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의 조사와 2023년 서울고등법원의 임성빈 대원에 대한 상소권 회복 청구 인용 등 최근에야 사법적 진실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구분 | 정부의 최초 발표 (1971) | 밝혀진 역사적 진실 |
대원 신분 | 북한 무장공비 또는 군 특수범 | 민간인 모집 북파공작원 (684부대) |
창설 목적 | 미발표 (은폐) | 김일성 암살 (1.21 사태 보복) |
생존자 처리 | 전원 자폭 사망 발표 | 4명 생존 후 기만적 재판을 통해 사형 |
사망자 예우 | 연고 없는 범죄자 취급 | 2017년 합동 봉안식 및 명예 회복 추진 |
[결론: 684부대의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
실미도 사건은 정권의 안보를 위해 개인의 생명과 인권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한민국 현대사 최악의 '국가 범죄'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 속에서 이름도 군번도 없이 잊혔던 31명의 청년은 단순한 범법자가 아니라 분단 현실과 권위주의 정권이 낳은 희생양이었다.
2023년 임성빈 대원의 상소권 회복 결정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의 법정은 닫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투명해야 하며, 국가 안보라는 명분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앞설 수는 없다. 실미도라는 외딴섬에서 스러져간 대원들, 억울하게 희생된 기간병들과 민간인들의 명복을 빌며 이 기록을 마친다. 이 비극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것만이 다시는 국가가 시민을 기만하고 배신하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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