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잃은 백성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극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조국을 짓밟은 압제자의 군복을 입고 압제자의 전쟁에 동원되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일일 것이다. 1943년 8월 1일은 바로 그 끔찍한 비극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조선 땅 전역에 옭아매어진 날이다.
이날 일제는 조선인 청년들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강제로 동원하는 '징병제(徵兵制)'를 전격적으로 실시했다. 토지와 쌀을 빼앗던 경제적 수탈을 넘어, 식민지 백성의 피와 목숨까지 쥐어짜 내는 궁극적인 인적 수탈의 빗장이 열린 것이다. 1943년 8월 1일 징병제 실시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식민지 청년들의 참혹한 상흔을 깊이 있게 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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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타가키 세이시로 일제 조선군 사령관이 조선인 징병 신체검사장을 순시하고 있다. 관동군 참모시절 일제의 중국침략을 주도한 그는 종전후 A급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
1. 태평양 전쟁의 수렁과 일제의 심각한 병력 부족
일제가 조선인에게 총을 쥐여주면서까지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침략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극심한 병력난 때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단기간에 중국 대륙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했으나, 전쟁은 수렁에 빠져 기약 없이 길어졌다.
설상가상으로 1941년 12월,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며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전선은 중국 대륙을 넘어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수많은 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전선이 넓어지고 미군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일본군 사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일본 본토의 청년들을 징집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뚫린 전선을 메울 수 없는 한계 상황에 직면하자, 일제는 마침내 조선인의 '피(혈세)'를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2. '지원'이라는 이름의 기만: 육군특별지원병제도
물론 1943년 징병제가 실시되기 전에도 조선인이 일본군에 동원되는 제도는 존재했다. 일제는 19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모집했다. 1943년에는 이를 해군으로 확대한 '해군특별지원병령'도 실시했다.
명칭은 '지원'이었지만 실상은 거대한 기만이자 강요였다. 일제는 경찰, 면장, 학교 교사 등 행정력과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각 지역과 학교에 할당량을 매기고 청년들의 지원을 강압했다. 지원하지 않는 청년과 그 가족은 '비국민(非國民, 일본 제국에 충성하지 않는 자)'으로 낙인찍혀 배급이 끊기거나 모진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반강제적으로 혈서를 쓰며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갔다. 하지만 전세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이 위장된 지원제도조차 한계에 부딪혔고, 일제는 합법적인 강제 동원 수단인 징병제 카드를 꺼내 들게 된다.
3. 1943년 8월 1일, 피의 징병제 실시와 징병검사
1943년 3월, 일제는 제81회 제국 의회에서 병역법을 개정하여 징병의 의무를 조선인에게도 적용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3년 8월 1일을 기해 '조선인 징병제'가 공식적으로 실시되었다.
이날부터 만 20세에 달한 조선의 모든 청년들은 병적에 편입되었고, 무자비한 징병검사(신체검사)가 시작되었다. 일제는 조선 전역에 신체검사장을 설치하고 헌병과 순사를 동원해 청년들을 색출해 냈다. 갑종, 을종 등 신체검사 합격 판정을 받은 청년들에게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의 '붉은색 소집 영장'이 날아들었다.
1944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인 징집병들의 입대가 시작되었다. 기차역과 신사 앞에서는 강제로 징집되어 떠나는 아들의 손을 붙잡고 오열하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일제는 이를 '반도(조선) 청년들이 천황 폐하의 적자(赤子)로 다시 태어나는 영광스러운 날'이라며 대대적인 선전과 축하 행사를 강요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4.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피를 요구하기 위한 사상 통제
일제에게 조선인 징병제는 커다란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식민지 백성에게 총을 쥐여주면 그 총구가 일본을 향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일제는 징병제 실시를 전후하여 극단적인 민족 말살 정책인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와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를 광적으로 밀어붙였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일본인'으로 개조하기 위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제했다. 매일 아침 궁성을 향해 절을 하게 하고(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게 했다. 우리말 사용은 철저히 금지되었다.
일제는 "징병의 의무를 다해야만 비로소 완전한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며 조선인들을 기만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군대에 끌려간 조선인 청년들은 철저한 이등 국민 취급을 받았다. 살인적인 구타와 가혹행위, 일본인 선임병들의 가혹한 민족 차별 속에서 조선인 청년들은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병영 내에서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5. 총알받이가 된 청년들과 참혹한 전장의 실상
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은 주로 어디로 끌려갔을까. 그들은 중국 전선은 물론,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 사이판, 뉴기니, 동남아시아의 버마(미얀마), 필리핀 등 태평양 전쟁의 가장 참혹한 격전지로 내몰렸다.
그곳에서 조선인 청년들은 사실상 '총알받이'나 인간 방패 취급을 받았다. 무기와 식량 보급이 끊긴 열대의 정글 속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적의 총탄이 아닌 굶주림(아사)과 풍토병으로 죽어갔다. 일본군 지휘부는 패전이 짙어지자 항복 대신 전원 옥쇄(玉碎, 명예롭게 옥처럼 부서져 죽음)를 강요했고,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라는 미명 하에 자살 공격기 조종석에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밀어 넣기도 했다.
또한 일부 조선인 청년들은 동남아시아 지역의 연합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동원되었다. 일본군 장교들의 가혹한 명령에 따라 포로들을 관리해야 했던 이들은, 종전 후 연합군의 전범 재판에서 억울하게 'BC급 전범'으로 몰려 일본인 지휘관들을 대신해 사형을 당하거나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참담한 비극을 겪기도 했다.
6. 학도지원병과 징용: 씨를 말리는 전방위적 인적 수탈
1943년 8월 1일의 징병제 실시는 시작에 불과했다. 전황이 더욱 절망적으로 치닫던 1943년 11월, 일제는 징집 연기 대상이었던 전문학교와 대학에 재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마저 전쟁터로 끌고 가는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식식한 지식인 청년들마저 강제로 펜을 꺾고 총을 들어야 했다.
나아가 군인이 아닌 노동력으로 끌고 가는 징용(徵用) 역시 극에 달했다. 탄광의 막장, 군수 공장, 비행장 건설 현장으로 수백만 명의 조선인들이 끌려가 채찍질 아래 노예처럼 노동을 착취당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과 1945년, 조선의 산하에는 일할 수 있는 젊은 청년과 남성의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렀다.
7. 해방 이후: 야스쿠니의 포로들과 끝나지 않은 눈물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조국은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강제로 전쟁터로 끌려갔던 수많은 조선인 청년들에게 해방은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열대의 정글과 외딴섬에서 죽어간 이들의 유골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다. 살아남은 자들 역시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편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 귀국길에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등 참변을 당해 바다에 수장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전후 일본 정부의 기만적인 태도다.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정당한 사죄와 배상은 1965년 한일협정이라는 정치적 논리 속에 묻혀버렸다. 더욱 원통한 일은 천황을 위해 죽기를 강요당했던 조선인 희생자들의 위패가 유족들의 반대와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범들이 합사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무단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살아서는 일제에 끌려가 목숨을 잃었고, 죽어서는 일본의 군신(軍神)으로 포로가 되어 있는 기막힌 현실은 징병제의 비극이 현재 진행형임을 말해준다.
맺음말
1943년 8월 1일 징병제 실시는 제국주의가 식민지 백성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폭력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날이다. 남의 나라 침략 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이름 모를 이국의 땅에서 억울하게 눈을 감아야 했던 조선 청년들의 희생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아프고 시린 상처 중 하나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의 책임과 남겨진 이들의 눈물은 아직 완전히 닦이지 않았다. 강제 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왜곡에 맞서 그날의 진실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마땅히 바쳐야 할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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