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입: 9월 2일과 빙허(憑虛) 현진건의 탄생, 그 전략적 위상
1900년 9월 2일, 대구의 한 개화파 지식인 가문에서 한국 근대 문학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거성, 빙허(憑虛) 현진건이 탄생했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대한제국의 황혼과 일제의 침탈이 교차하던 암흑기였으나, 역설적으로 그의 존재는 한국 문학사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이정표 중 하나가 되었다. 현진건은 단순히 허구의 세계를 직조하는 소설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문단의 형식적 완미함을 구축한 스타일리스트이자, 서슬 퍼런 일제의 검열에 맞선 언론인이며, 죽는 순간까지 변절하지 않았던 독립유공자라는 입체적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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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玄鎭健, 1900년 9월 2일~1943년 4월 25일) |
현진건의 초기 생애는 그가 지닌 근대적 지성과 세계적 안목의 근원을 잘 보여준다. 대구 전보사장 현경운의 4남으로 태어난 그는 1915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주입식 교육에 반발하여 이듬해 자퇴를 결심한다. 이후 도쿄 세이조 중학교를 거쳐 상하이 후장대학에서 수학하며 동아시아의 격동하는 정세를 직접 목격했다. 이러한 유학 경험은 그가 식민지 조선의 폐색된 현실을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제공했다. 1919년 귀국 후 1920년 잡지 『개벽』에 단편 「희생화」를 발표하며 시작된 그의 문학적 여정은, 자전적 고백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고발을 거쳐 민족적 역사 의식의 고취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승화의 과정이었다. 이제 그가 구축한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과 그 안에 담긴 시대의 통점들을 구체적으로 천착해보고자 한다.
2.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 체험과 고발의 연대기
현진건은 한국 소설 문학에서 단편 소설의 양식적 완성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선구자다. 1920년대 초기 그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투영된 삶을 바탕으로 한 '체험 소설'의 형식을 띤다. 대표작 「빈처」(1921)는 가난한 무명작가의 일상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무능력과 예술적 자존심 사이의 괴리를 정밀하게 묘사한다. 소설 속 '나'는 돈벌이를 못 한다는 이유로 친척들의 수군거림을 받으며, 아내의 비단옷조차 사주지 못해 장인의 생신잔치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는 초라한 인물이다. 특히 한성은행에 다니며 호강하는 처형과, 아내의 신발을 사다 주는 형부의 모습은 주인공의 경제적 무능을 더욱 비참하게 부각한다. 그러나 아내가 언니의 얼굴에 든 멍을 보며 "없으면 없는 대로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작가는 물질적 빈곤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 연대와 예술의 가치를 긍정한다.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1921)는 개인의 좌절을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확장한다.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으나 아무런 일자리도 찾지 못한 채 매일 술로 소일하는 남편의 모습은 당시 폐색된 사회 분위기를 상징한다. 이 소설의 백미는 아내가 남편을 술 마시게 하는 주범으로 지목한 '사회'를 딴 나라에나 있는 '요리집 이름'으로 오해하는 장면이다. 아내의 이러한 무지는 지식인과 민중 사이의 소통 단절을 드러내는 동시에,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은 주정꾼 노릇밖에 할 게 없는" 조선 사회의 폭력성을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작가의 시선은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하층민과 민중의 보편적 고통으로 침잠한다. 「B사감과 러브레터」(1925)는 엄격한 기독교 신자이자 독신주의자인 B사감의 이중적 심리를 통해 억압된 인간의 욕망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밤마다 학생들에게 압수한 러브레터를 읽으며 스스로 1인 2역의 연애 소동을 벌이는 B사감의 기괴한 모습은, 비정상적인 사회적 압박이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심리 묘사다. 또한 「운수 좋은 날」(1924)과 「고향」(1926)은 사실주의 문학의 정점이다. 인력거꾼 김첨지의 비극을 다룬 「운수 좋은 날」은 하층민의 참혹한 삶을 반어적 구성을 통해 극대화했고, 「고향」은 식민지 수탈로 인해 파괴된 농촌 공동체의 참상을 '비참한 조선의 얼굴'로 상징화했다. 이처럼 예술가의 사회적 운명에 천착했던 그의 필치는,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되자 민족의 근원을 탐구하는 역사 소설의 세계로 망명하게 된다.
3. 역사의 재구성: 무영탑과 흑치상지에 담긴 민족혼
1930년대 후반, 일제의 군국주의적 억압이 강화되며 사상의 자유가 말살되자 현진건은 펜 끝을 과거의 역사로 돌렸다. 이는 현실 회피가 아니라 과거의 영웅과 예술혼을 소환하여 민족의 자존감을 지키려는 전략적 저항이었다. 그의 유일한 완성 장편 역사 소설인 『무영탑』(1938~1939)은 석가탑 건립 설화를 모티프로 하여 백제 석공 아사달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예술적 승화를 그린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아사달과 아사녀, 주만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투영했다. 국선도파인 유종과 경신을 긍정적인 민족주의자로 설정한 반면, 당나라 유학파인 금지와 금성을 비열하고 사대주의적인 인물로 그려냄으로써 일제강점기 친일파와 민족주의자의 갈등 구조를 은유적으로 재현했다. 아사달이 죽은 아내와 연인 주만의 얼굴을 합쳐 거룩한 부처의 미소를 새겨내는 장면은, 개인적 비극을 예술적·종교적 성취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지를 상징한다.
나아가 현진건은 『흑치상지』(1939)를 통해 더욱 직접적인 민족 의식을 드러냈다. 망국의 고통 속에서도 백제 부흥 운동에 헌신했던 실존 영웅 흑치상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곧 일제 치하의 조선 민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전파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발칙한 저항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연재 중단이라는 강수를 맞게 된다. 이후 시도한 『선화공주』 역시 미완으로 남았지만, 이는 그의 문학이 지닌 항일적 파괴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한다. 총독부의 압박으로 문학적 활로가 막힌 이 시기는 언론인으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수난의 시기와도 궤를 같이한다.
4. 언론인 현진건과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
현진건의 삶에서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은 그의 문학적 지조를 실천으로 옮긴 현장이었다. 조선일보와 시대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단순한 정보 전달자가 아닌 시대의 파수꾼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이 사건은 이길용 기자가 주도하고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이 직접적인 책임을 진 의거였다.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운 대가로 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 동안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당한 그는 일제의 감시 속에 어떤 언론 활동이나 집필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야 했다. 더욱이 그의 형 현정건이 상하이 독립운동 중 체포되어 옥사(1932)하고, 이듬해 형수까지 자살하는 참상을 겪으면서 현진건의 내면에는 일제에 대한 증오와 민족적 슬픔이 깊게 각인되었다.
옥고 이후의 삶은 비참할 정도로 궁핍했다. 제기동 빈민가에서 폐결핵과 장결핵이라는 지병과 싸우면서도 그는 생계를 위해 양계(닭 치기)를 하거나 미두(쌀 투기)를 하며 연명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친일 단체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일본어로 글을 쓰라는 총독부의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이처럼 곤궁한 처지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항일 언론 정신과 민족적 지조에 대한 뒤늦은 예우였다.
5. 사라진 흔적: 부암동 고택 철거와 기억의 부재
현진건이 고난의 시절을 보내며 『무영탑』과 『흑치상지』를 집필했던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5-2번지. 이곳은 그가 1936년 출옥 후 타계할 때까지 머물렀던 역사적 현장이었다. 대지 267평, 건평 70평 규모의 이 한옥은 팔작지붕과 겹처마를 갖춘 근대 건축의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 소중한 유산은 2003년 11월 14일, 현대 한국 사회의 무지와 행정적 무능 속에 단 하루 만에 철거되어 사라졌다.
종로구 문화재심의위원회가 수차례 '현진건 기념관' 건립을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문화재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입을 거절했다. 당국이 수리비 보조 문제를 논의하던 사이, 고택은 민간업자의 포클레인 아래에서 자재들마저 강원도로 팔려 나가는 수모를 겪었다. 현재 그 터에는 수백 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만이 홀로 남아 주인을 잃은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이 사건을 두고 "지키겠다는 정책만 발표하고 행동하지 못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했고, 문화계는 이를 "음산하고 비참한 대한민국의 문화 수준을 드러낸 참극"이라며 규탄했다. 소설 「고향」에서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보았던 작가의 흔적을, 정작 해방된 조국이 스스로 지워버린 꼴이다. 비록 물리적인 고택은 파괴되었으나, 그가 남긴 문학적 유산과 고결한 저항 정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살아남아 기억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6. 결론: 21세기에 되새기는 빙허의 유산
빙허 현진건은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완성을 이룩한 거장인 동시에, 언론의 자유와 민족의 자존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제단에 올린 선각자였다. 그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 가장 정직한 문장으로 조선의 아픔을 기록했으며, 과거의 역사에서 민족의 뿌리를 찾아내어 꺾이지 않는 희망의 서사를 직조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교훈을 남긴다. 문학은 시대의 아픔에 응답해야 하며, 언론은 권력의 억압 앞에서도 진실을 외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2005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그의 이름은 이제 문학 교과서를 넘어 한국인의 민족 정신 속에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한다. 사라진 부암동 고택의 빈터를 대신하여,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 아로새겨진 저항의 필치를 우리 시대의 문화적 가치로 복원해야 할 책무가 있다.
오늘 9월 2일, 현진건의 탄생을 기리며 우리는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자문해 본다. 그것은 단순히 외세의 억압에서 벗어난 물리적 해방을 넘어, 지조 있는 지식인이 존경받고 예술적 가치가 보존되며 역사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는 내면적 해방의 국가였을 것이다. 빙허 현진건이 남긴 문학적 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사회적 부조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를 향한 민족적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꺼지지 않는 등불로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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