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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2일 수요일

[오늘의 역사] 1936년 8월 13일, 가슴에서 지운 일장기와 꺾이지 않은 붓대: 일장기 말소 사건의 재구성

1. 서론: 베를린의 승전보와 식민지 조선의 눈물

1936년 8월 9일 밤, 식민지 조선의 심장부인 경성 종로의 밤은 차가운 침묵 대신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독일 베를린에서 들려올 승전보를 기다리며 수많은 군중이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등 주요 보도기관 앞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8월 10일 새벽, 마침내 전해진 소식은 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에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마라톤의 꽃이라 불리는 올림픽 마라톤에서 조선의 청년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 2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이다. 이는 단순히 스포츠 경기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라 여겨졌던 '2시간 30분'의 벽을 세계 최초로 허문 이 기록은,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던 조선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이자 정체성 회복을 위한 강력한 시각적 투쟁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손기정의 우승은 전략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일제는 그를 '일본인 손 키테이'로 전 세계에 홍보하며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선전하려 했으나, 조선의 언론인들은 이 승리를 민족의 것으로 되찾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군중의 환호 속에서 언론인들은 고민에 빠졌다. 세계를 제패한 영웅의 가슴에 선명하게 박힌 일장기를 그대로 보도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바로잡을 것인가. 이 뜨거웠던 환호는 곧 일제의 검열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을 뚫고 '사진'이라는 구체적인 저항의 수단으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2. 사건의 전말: 1936년 8월 13일, 첫 번째 '말소'의 기록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일장기 말소 사건은 8월 25일 자 동아일보의 보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기록물 아카이브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거사의 서막은 8월 13일이었다. 이날은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기 다른 경로로 입수한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낸 채 세상에 내놓은, 한국 언론사상 유례없는 '침묵의 의거'가 일어난 날이다.

사건의 발단이 된 사진은 8월 11일 오전 1시 10분, 일본 동맹통신 특파원이 무선으로 전송한 시상식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진부 사사키 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당시 조선의 언론사들은 자국 특파원을 파견할 수 없었기에 일본 미디어를 통해 들어온 이 사진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길용 기자는 훗날 "손 선수를 왜놈에게 빼앗기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는데, 이는 당시 민족 언론인들이 공유했던 보편적인 분노였다.

최근의 연구와 사료 발굴을 통해 확인된 8월 13일의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다.

구분조선중앙일보 (1936. 8. 13.)동아일보 (1936. 8. 13.)
판본 및 면수조간 2판(경성판), 제4면조간 1판(지방판), 제2면
보도 내용손기정·남승룡 시상식 사진손기정·남승룡 시상식 사진
말소 범위손기정과 남승룡 두 선수 모두 말소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위주 말소
기록적 특성안료 덧칠을 통한 물리적 말소사진을 흐리게 처리하는 기법 사용

여기서 주목할 점은 누가 '최초'인가라는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 두 신문사가 각기 다른 에디션(Edition)에서 암묵적인 공조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채백과 주동진 등의 연구에 따르면, 동아일보 지방판 조간 1판이 시간상으로는 앞섰으나, 조선중앙일보는 2판 경성판에서 3위 남승룡 선수의 일장기까지 완벽하게 지워내는 등 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특히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체육부 기자 유해붕에게 "붓대가 꺾일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하라"는 엄중한 지시를 내렸으며, 이는 기자들이 총독부의 검열관들과 벌인 심리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3. 기술적 저항: 사진 제판 과정에 숨겨진 기자들의 의거

일장기 말소는 결코 인쇄상의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화학 물질과 인쇄 기술의 한계를 정밀하게 이용한 '기술적 테러'에 가까운 저항이었다. 당시 검열관들의 눈을 피해 신문 지면에 민족의 자존심을 새기기 위해 기자들은 어두운 암실에서 목숨을 건 실험을 단행했다.

동아일보의 의거는 이길용, 이상범, 신낙균, 서영호로 이어지는 치밀한 협업 시스템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길용 기자가 이상범 화백에게 일장기를 지워달라고 부탁하자, 이상범은 도분말소(塗粉抹消) 기법을 통해 1차로 사진을 수정했다. 하지만 더 완벽한 말소를 위해 사진부의 서영호와 신낙균은 더욱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이들은 사진 제판의 핵심인 습판(Wet Plate) 공정에서 강력한 부식제인 시안화칼륨(일명 청산가리)용액을 사용했다. 청산가리 용액으로 일장기가 위치한 원판의 습판막을 화학적으로 녹여내어, 인쇄된 사진에서는 일장기의 흔적조차 남지 않는 선명한 '공백'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나중에 일제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청산가리를 실수로 많이 써서 사진이 부식되었다"는 기술적 변명을 미리 설계한 치밀한 전략이었다.

반면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는 사진기자 김경석 등과 협의하여 안료를 덧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은 전송 상태가 좋지 않은 사진을 역이용하여, 일장기가 부착된 가슴 부위를 진한 안료로 뭉개버린 뒤 인쇄에 넘겼다. 당시의 조악한 인쇄 품질 덕분에 검열관들은 이를 단순한 인쇄 결함으로 오해하고 통과시켰다. 이처럼 화학적 부식과 물리적 덧칠이라는 서로 다른 기술을 동원한 언론인들의 투쟁은, 8월 25일 동아일보가 석간 2판에서 더욱 선명하게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게재하면서 일제의 본격적인 광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4. 일제의 칼날: 무기 정간과 폐간의 비극

일제는 8월 25일 자 동아일보의 보도를 계기로 대대적인 탄압의 칼날을 휘둘렀다. 경기도 경찰부는 이 사건을 '불온한 민족주의적 음모'로 규정하고, 수사 범위를 이미 지난 보도에서 일장기를 지웠던 조선중앙일보로까지 확대했다. 이는 기록상 '경고검 비 제1929호(京高檢 秘 第1929號)' 등으로 명시된 조직적 언론 압살의 시작이었다.

주요 언론인 수난 및 탄압 명단

일제는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의 핵심 인력 8명을 구속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 현진건(사회부장) : 한국 근대소설의 거장이자 언론인으로서 이 사건의 실질적 책임자로 구속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로 인해 그의 문학적 성취는 강제로 중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 이길용(운동부 기자) :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언론계에서 영구 퇴출당하는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 신낙균(사진과장) : 한국 사진계의 선구자로서 제판 과정의 기술적 책임을 지고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
  • 서영호, 백운선, 이상범, 장용서, 최승만(신동아 잡지부장) : 각각 고문과 구금, 영구 퇴직 서약서 강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석방 조건으로 '향후 언론기관 불참'과 '가중 처벌 각오'라는 노예적 서약서를 강요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문학계와 언론계는 현진건과 같은 대문호를 잃는 등 돌이킬 수 없는 인적 자산의 손실을 입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조선중앙일보의 종말이었다. 동아일보가 279일간의 무기 정간을 버텨내고 1937년 6월 복간한 것과 달리, 재정 기반이 취약했던 조선중앙일보는 복합적인 원인으로 무너졌다. 총독부는 여운형 사장의 강제 사임을 집요하게 압박했고, 내부적으로는 총독부에 협력해서라도 신문을 내려는 성원경 중심의 세력과 지조를 지키려는 여운형 간의 격렬한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 조선중앙일보는 재정난과 정치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37년 11월 5일, 발행 허가 효력 상실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33년 여운형 취임 이후 민족 언론의 선봉에 섰던 붓대가 일제의 물리적, 경제적 탄압에 의해 꺾이고 만 것이다.

5. 결론: "붓대가 꺾일 때까지" - 일장기 말소 사건의 현대적 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은 단순한 사진 수정 사건이 아니라, 식민 지배라는 거대한 어둠에 맞서 '시각적 주권'을 선언한 민족주의 운동의 정수였다. 기록물 아카이브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언론이 권력의 검열에 어떻게 기술적, 예술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설적인 사례다.

"붓대가 꺾일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하라"던 여운형의 사자후는 오늘날의 언론인들에게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당시의 기자들은 투옥과 고문, 그리고 생계 수단인 언론계에서의 영구 퇴출이라는 개인적 파멸을 예견하면서도 일장기를 지워내는 붓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청산가리 용액으로 사진 원판을 녹여내며 식민지의 우울을 씻어냈고, 안료 덧칠을 통해 조선의 자존심을 덧입혔다.

오늘날 이 사건은 한국 미디어사 및 독립운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88년 전 조선중앙일보가 폐간의 아픔을 겪으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그 정신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언론 자유와 민족 주권의 소중한 뿌리가 되었다. 비록 신문사는 문을 닫았지만, 그들이 가슴에서 지워버린 일장기는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가슴에 가장 선명한 저항의 문장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흐르고 있다. 80여 년 전 그날의 용기는 시간이 흘러도 꺾이지 않는 진실의 힘으로 기록되어 우리 곁에 영원히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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