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은 세계사적으로 거대한 전환점이 된 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스페인이 그라나다를 함락시키며 레콘키스타(국토 회복 운동)를 완성했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향해 닻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성베드로의 성좌에 올랐다. 바로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제214대 교황 알렉산데르 6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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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알렉산데르 6세(라틴어: Alexander PP. VI, 이탈리아어: Papa Alessandro VI,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제214대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 |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권모술수, 성직 매매, 족벌주의(네포티즘),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교회의 타락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뛰어난 외교관이자 행정가였으며, 예술을 사랑한 르네상스의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1492년 그가 교황으로 취임하며 열어젖힌 '보르자 시대'는 유럽 역사에 짙은 그림자와 찬란한 빛을 동시에 남겼다.
1. 보르자 가문의 비상과 로드리고의 야망
스페인 출신의 이방인 가문
보르자(Borgia) 가문의 본래 성씨는 스페인 발렌시아 지방의 보르하(Borja)다. 이 가문이 로마의 권력 중심부로 진입하게 된 것은 로드리고의 외삼촌인 알폰소 데 보르하가 1455년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면서부터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등 유력한 도시국가들과 쟁쟁한 귀족 가문(메디치, 스포르차, 오르시니, 콜론나 등)이 권력을 다투는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페인 출신의 교황은 이탈리아 본토 귀족들에게 철저한 이방인이자 경계의 대상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다
갈리스토 3세는 로마 내에서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지기 위해 혈연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는 조카인 로드리고 보르자를 불과 25세의 나이에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교황청의 핵심 요직인 궁무처장(부대서기장)에 앉혔다. 로드리고는 삼촌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행정 능력을 발휘하며 교황청 내에서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는 무려 35년 동안 부대서기장직을 유지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비오 2세, 바오로 2세, 식스토 4세, 인노첸시오 8세 등 여러 교황을 거치며 권력의 핵심 실세로 자리 잡았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와 달변을 갖추었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카리스마로 교황청 내외의 많은 인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2. 1492년 콘클라베, 돈과 권력이 빚어낸 성좌
치열한 권력 투쟁의 장
1492년 7월 2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선종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Conclave)가 소집되었다. 당시 교황 후보로 나선 유력한 인물은 세 명이었다. 이탈리아 굴지의 가문 출신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의 율리오 2세), 밀라노 공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과 행정 경험을 갖춘 로드리고 보르자였다.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성직 매매
이 콘클라베는 역사상 가장 부패한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델라 로베레에 맞서기 위해, 로드리고는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와 은밀한 거래를 맺었다. 로드리고는 스포르차에게 자신이 교황이 되면 부대서기장 자리와 함께 막대한 연금, 화려한 저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스포르차가 로드리고를 지지하기로 표를 돌리자, 다른 추기경들 역시 돈과 영지, 수도원장직 등 각종 이권을 대가로 로드리고에게 표를 던졌다.
은 짐을 가득 실은 노새 네 마리가 스포르차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당시의 소문은 1492년 콘클라베의 성직 매매(Simony)가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1492년 8월 11일, 로드리고 보르자는 투표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 제214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알렉산데르 6세'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같은 해 8월 26일, 그는 로마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치르며 교황좌에 올랐다.
3. 세속의 군주인가, 교회의 목자인가: 보르자 시대의 개막
공공연한 비밀, 교황의 자녀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이나 추기경들이 은밀히 내연녀를 두고 사생아를 낳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는 그 수준을 넘어 자신의 자녀들을 공공연히 인정하고, 그들에게 막대한 권력과 부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오랜 정부였던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Vannozza dei Cattanei)와의 사이에서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라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족벌주의의 극치
교황이 된 알렉산데르 6세는 이탈리아 내에서 보르자 가문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자녀들을 철저히 정치적 도구로 활용했다. 장남 후안은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똑똑하고 잔혹했던 차남 체사레 보르자는 1475년 9월에 태어나 1493년 9월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며 만 18세(한국 나이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최고위 성직에 올랐다(체사레는 훗날 이 추기경직을 던져버리고 세속 군주가 되어 로마냐 지방을 정복하며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롤모델이 된다).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 역시 가문의 정치적 동맹을 위해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 나폴리의 아라곤 왕가, 그리고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과 세 번이나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교황청은 종교적 성스러움보다는 가문의 영광과 영토 확장을 위한 세속적 군주의 궁정처럼 변모해갔다.
4. 역사를 바꾼 칙서와 정치적 행보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비록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정치와 외교 무대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뛰어난 통치자였다.
신대륙을 반으로 나누다: 토르데시야스 조약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아메리카)에 도달한 후, 해양 강국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는 신영토의 영유권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다. 전쟁 직전까지 간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한 사람이 바로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였다.
그는 1493년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100레과(약 수백 km)'를 기준으로 대서양에 가상의 선을 긋는 교황 칙서(Inter caetera)를 발표했다. 이 선을 기준으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독점적 권리를 갖도록 한 것이다. 이듬해인 1494년, 두 나라는 교황의 칙서를 바탕으로 기준선을 서쪽으로 조금 더 이동시킨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체결했다. 교황의 이 결정은 향후 수백 년간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이 스페인어권이 되고,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권이 되는 세계사의 거대한 지형도를 결정지었다.
이탈리아를 지킨 외교술과 사보나롤라와의 대립
1494년,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고, 프랑스군은 로마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는 로마의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뒤 특유의 노련한 외교술로 샤를 8세와 협상을 이끌어내어 로마의 약탈을 막아냈다. 이후 그는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베네치아 등을 끌어들여 '신성 동맹(Holy League)'을 결성하고 프랑스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한편, 피렌체에서는 도덕적 원리주의자인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가 교황청의 부패와 알렉산데르 6세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맹렬히 비난하며 이탈리아 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초기에 그를 회유하려 했던 알렉산데르 6세는 사보나롤라가 끝내 굴복하지 않자 1497년 그를 파문했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이단으로 몰려 피렌체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적 숙청이었다.
5. 르네상스의 후원자, 바티칸에 남긴 예술적 유산
권력 투쟁과 스캔들에 가려져 있지만, 알렉산데르 6세는 르네상스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예술가들을 바티칸으로 불러들여 문화적 중흥을 이끌었다.
가장 대표적인 유산은 오늘날 바티칸 미술관의 일부인 '보르자 아파트(Appartamento Borgia)'다. 알렉산데르 6세는 이탈리아의 거장 핀투리키오(Pinturicchio)와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머물 관저의 벽면과 천장을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게 했다. 이 벽화들에는 기독교의 성인들뿐만 아니라 이집트 신화의 이시스,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심지어 교황 자신과 보르자 가문의 인물들이 성화 속에 모델로 그려져 있다. 이는 르네상스 시대 특유의 인문주의와 교황의 세속적 권시욕이 완벽하게 결합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는 1499년 프랑스의 추기경을 위해 무명의 젊은 조각가에게 대리석 조각을 의뢰하도록 승인했는데, 이 작품이 바로 24세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불세출의 명작 '피에타(Pietà)'다. 알렉산데르 6세 시기의 로마는 피렌체를 넘어 르네상스 예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6. 흑색선전인가 진실인가: 타락한 교황이라는 꼬리표
보르자 가문을 둘러싼 검은 전설 (Black Legend)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 가문에 덧씌워진 악명은 사실 당대 정적들이 퍼뜨린 과장된 소문과 '흑색선전'이 결합된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칸타렐라(Cantarella)라는 독약을 타서 정적을 암살했다거나, 교황궁 안에서 난교 파티(밤나무의 연회)를 벌였다는 소문, 심지어 딸 루크레치아와 근친상간을 맺었다는 경악스러운 이야기들은 대부분 그의 숙적이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율리오 2세) 세력이나 스페인 출신 교황을 혐오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이 의도적으로 부풀린 가짜 뉴스에 가깝다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물론 그가 뇌물로 교황직을 샀고, 자식들을 위해 교회의 재산을 사유화했으며,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제거한 냉혹한 정치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당대의 다른 이탈리아 군주들이나 이전, 이후의 교황들(예: 손수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선 율리오 2세 등) 역시 비슷한 방식의 권력 정치를 펼쳤다. 알렉산데르 6세가 유독 '악의 화신'으로 낙인찍힌 것은 그가 외부인(스페인계)으로서 지나치게 성공적이었고, 그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너무나 위협적인 정복자였기 때문이다.
비극적 최후
보르자 가문의 영광은 교황의 죽음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1503년 8월, 72세의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와 함께 로마 귀족의 연회에 참석했다가 심한 고열에 시달리며 쓰러졌다. 정적들은 교황이 남을 독살하려다 실수로 독이 든 와인을 마셨다고 주장했으나, 현대 의학자들과 역사가들은 당시 로마에 창궐했던 말라리아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본다.
1503년 8월 18일, 알렉산데르 6세가 숨을 거두자 권력의 기반을 잃은 체사레 보르자는 급격히 몰락했다. 뒤이어 교황좌에 오른 인물은 보르자 가문의 철천지원수였던 율리오 2세였다. 율리오 2세는 "보르자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다.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는 파문하겠다"며 보르자 아파트를 폐쇄해 버렸고, 보르자 가문의 기록을 철저히 지워나갔다.
알렉산데르 6세가 남긴 역사적 유산
1492년 8월, 제214대 교황으로 취임한 알렉산데르 6세는 중세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르네상스 시대를 지배한 가장 강력하고 세속적인 절대 군주였다. 그의 치세 아래 바티칸은 부와 예술이 집결하는 황금기를 누렸고, 외교적 수완을 통해 교황령의 위상은 극대화되었다.
하지만 종교적 본분을 망각하고 족벌주의와 권력욕에 집착했던 그의 행보는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 권위를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보르자 교황 시대를 거치며 누적된 교황청의 부패와 세속화는 결국 훗날 마르틴 루터가 불을 지피게 될 종교개혁(Reformation)의 거대한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1492년의 오늘, 그가 쓴 교황의 삼중관은 르네상스의 화려한 영광이자 동시에 중세 교회의 파멸을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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