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해방 정국의 교육적 과업과 국립대학 설립의 의미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단순한 주권의 회복을 넘어,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걷어내고 새로운 국가적 기틀을 세워야 하는 거대한 과업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 그중에서도 교육은 국가 재건의 핵심적 상징이자 전략적 자산이었다. 일제가 남긴 군국주의적 교육 체제를 탈피하고 민족 교육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은 해방 정국이 마주한 가장 절박한 과제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 속에서 추진된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은 해방된 한국이 지향해야 할 고등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정립하려는 국가적 의지의 결집체였다.
서울대학교의 탄생은 단순한 개별 교육기관의 개교가 아니었다. 이는 분산된 지적 자원을 통합하여 국가 발전의 견인차로 삼으려는 고도의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국제적 수준의 종합대학 모델을 구축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지적 권위를 세우려는 시도였다. 미군정과 국내 교육계는 서울대학교를 통해 고등교육의 체계적 기틀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재건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이 거대한 설계가 법적 구속력을 얻으며 구체화된 시작점이 바로 '군정법령 제102호'의 공포였다.
2. 법령 제102호와 서울대학교의 공식 출범
서울대학교 설립의 구체적인 행정 절차는 1946년 7월 13일, 미군정 문교부장 유억겸과 차장 오천석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하 국대안)'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발표로부터 약 한 달간의 격동을 거쳐,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군정법령 제102호)'이 공포됨으로써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대학교로서 법적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
미군정이 고집한 '종합대학교' 모델은 산재한 전문학교와 대학을 통합하여 관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행정적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당시 문교부는 통합의 명분으로 건물 및 설비의 공동 활용, 부족한 교수 인력의 효율적 배치, 국가 재정의 합리적 운영을 내세웠다. 또한, 단과대학 위주의 파편화된 교육에서 벗어나 종합대학 체제 안에서 학생들이 폭넓은 문화적 혜택을 누리고, 대학원을 통해 전문적인 학술 연구자를 양성하려는 전략을 수립했다.
당시 군정법령 제102호에 의해 통합의 대상이 되어 서울대학교의 모체가 된 기관은 1개의 대학과 9개의 전문학교로 구성되었다.
- 경성대학 (구 경성제국대학의 후신, 법문·의·이공학부)
- 경성법학전문학교
- 경성공업전문학교
- 경성광산전문학교
- 경성사범학교 및 경성여자사범학교
- 경성의학전문학교
- 수원농림전문학교
- 경성경제전문학교 (구 경성고등상업학교)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사립 기관의 관립 전환)
- 경성약학전문학교 (사립 기관의 관립 전환)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가진 기관들의 통합은 서울대학교가 지닌 학문적 외연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나, 각 학교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행정적 편의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동시에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울대학교의 뿌리가 단순히 일제 강점기의 산물인 경성제국대학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서울대학교의 진정한 뿌리: 10개 기관의 통합과 역사적 계보
일각에서는 서울대학교의 역사를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이는 한국 근대 교육의 유구한 계보를 간과한 시각이다. 서울대학교의 진정한 가치는 1946년 통합된 각 학교가 대한제국 시기부터 자발적으로 쌓아온 민족 교육의 정통성에 있다. 이들 관립 교육기관은 일제의 국권 침탈기에도 그 실체를 유지하며 민족의 지혜를 지켜온 보루였다.
주요 단과대학들의 전신을 추적해보면 서울대학교가 지닌 역사적 깊이를 실감할 수 있다.
- 법과대학: 1895년 4월 19일 법제가 정비되어 5월에 개소한 '법관양성소'를 기원으로 한다. 이곳은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이 수석 졸업생으로 배출된 곳이며,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가 1기생으로 입학했던 근대 법학교육의 성지다. 이후 법학교, 경성전수학교를 거쳐 경성법학전문학교로 이어졌다.
- 사범대학: 1895년 5월 10일 공포된 '한성사범학교관제'에 뿌리를 둔다. 이는 근대적 교원 양성의 시초로서, 일제강점기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사계의 중추가 되었다.
- 의과대학: 1899년 7월 5일 '의학교규칙'에 따라 설립된 '의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내부병원인 광제원 등을 통합한 '대한의원' 교육부와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경성의학전문학교로 변천하며 한국 의학의 명맥을 이었다.
- 농생명과학대학 및 공과대학: 1904년 6월 8일 관제가 마련된 '농상공학교'에 기원을 둔다. 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고종의 의지에 따라 설립된 이 학교는 이후 수원농림전문학교와 관립공업전습소 등으로 분화되며 한국 산업 발전의 지적 토대를 닦았다.
이처럼 서울대학교는 고종 시대부터 자력으로 일궈낸 근대 교육의 성과를 집대성한 기관이다. 하버드대학교가 교사 1명과 학생 9명의 '목사양성소' 시절(1636년)을 개교 원년으로 삼듯, 우리 또한 서울대학교의 시원을 대한제국기의 관립 학교들로 소급하여 이해할 때 그 역사적 정통성을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찬란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설립 과정에서 발생한 '국대안 파동'은 대학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4. 격동의 소용돌이: '국대안 파동'과 학원의 자치권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이어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운동(국대안 파동)'은 해방 정국 최대의 학원 분쟁이자 한국 현대 지성사의 비극이었다. 설립안 발표 직후부터 통합 대상 학교의 교수와 학생들은 미군정의 일방적인 통합 방식에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이 내세운 5대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관선 소수 이사회에 운영 전권을 부여하는 방식의 학원 자치 침해.
- 둘째, 학교 통합에 따른 학생 수용 능력의 실질적 감소 우려.
- 셋째, 교수 인력 부족 문제에 대한 대책 부재.
- 넷째, 이공계 고등교육 경시와 인문계 편향 우려.
- 다섯째,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친일 교수 배제 요구.
특히 미군정청이 초대 총장으로 임명한 미 해군 대위 출신의 **해리 엔스테드(Harry B. Ansted)**에 대한 반발은 극에 달했다. 대학 행정의 문외한인 미국인 장교가 총장으로 부임한 것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하라"는 요구와 함께 시작된 동맹휴학은 1946년 9월부터 서울대학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파동은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결부되면서 정치적 투쟁으로 변질되었다. 수습 과정에서 약 380명의 교수가 해직되고, 4,956명의 학생이 제적되거나 퇴학당하는 유례없는 인적 손실이 발생했다. 당시 학계의 거물이었던 화학자 이태규 박사는 연구 환경을 찾아 도미의 길을 택했고, 비날론의 발명가 리승기 박사는 월북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의 기틀을 닦았다. 이는 한국 현대 과학기술과 인문학 발전이 수십 년간 지체되는 뼈아픈 결과를 초래했다. 파동은 1947년 말 한국인 이춘호 박사가 제2대 총장으로 부임하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대학 구성원이 입은 내면의 상처는 수십 년간 이어졌다.
5. 공간의 통합: 동숭동 시대에서 관악 캠퍼스까지
설립 초기 서울대학교는 이름만 종합대학일 뿐, 시설은 서울 시내 곳곳에 분산된 '연합체'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숭동(법대·문리대), 연건동(의대·미대), 공릉동(공대), 종암동(상대), 용두동(사대) 등으로 흩어진 캠퍼스는 대학의 일체감을 저해하고 학문 간 교류를 가로막는 구조적 한계였다. 1958년 문리대 이양하 교수가 "종합성 결여에서 오는 약점과 모순이 해소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했을 정도로 통합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총 다섯 차례의 종합화 계획이 수립되었다.
- 1960년 종합화 7개년 계획: 4개 거점 지역(동숭동, 수원, 공릉동, 용두동) 집중 배치안.
- 1962년 종합화 5개년 계획: '동일계 대학 동일지 집중' 원칙에 따른 6개 센터(인문·사회, 교육, 공업, 농업, 예능, 의치약) 구상.
- 1966년 종합화 6개년 계획: 동숭동과 연건동을 메인 캠퍼스로 하고 공릉동과 수원을 분교화하는 계획.
- 1968년 종합화 10개년 계획: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기간이 연장되어 세계적 수준의 대규모 캠퍼스 조성을 목표로 함.
- 1971년 마스터 플랜 확정: 관악산 기슭의 골프장 부지(현 관악 캠퍼스)를 최종지로 확정하여 진정한 통합을 꾀함.
결국 한강 이남 개발 정책과 맞물려 관악 캠퍼스 조성이 추진되었다. 1975년 1월 20일, 동숭동의 짐을 실은 첫 번째 트럭이 출발하면서 '관악 시대'가 개막했다. 당시 동원된 12톤 트럭만 2,000여 대에 달한 거대한 이주 작전이었다. 정든 캠퍼스를 떠나며 학생들과 주민들은 눈물 섞인 박수를 보냈다. "마로니에와 은행나무는 이식이 불가능해 동숭동에 남았다"는 당시 신문 기사는 공간의 이동이 주는 서글픔과 설렘을 동시에 전해준다. 관악 이전은 분산된 학문적 역량을 결집하여 진정한 의미의 종합대학으로 도약하는 물리적·구조적 전환점이 되었다.
6. 지성의 기틀을 세우다: 도남 조윤제와 국문학의 정립
대학의 외형이 캠퍼스 통합으로 완성되었다면, 그 내면의 학문적 영혼을 불어넣은 것은 선구적 지식인들의 헌신이었다. 그 중심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을 역임한 도남 조윤제 박사가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문학 전공의 제1회 졸업생인 그는 식민지 지배라는 질곡 속에서도 국문학의 정체성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조윤제 박사는 '민족주의적 국문학' 관점을 견지하며, 국문학 연구가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닌 민족 독립운동의 연장선에 있음을 역설했다. 그는 "민족에서 살고, 민족에서 죽다(生於民族 死於民族)"라는 자찬 묘지명을 남길 만큼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타자를 배척하는 배타적 종족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주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반억압적 민족주의를 주창했으며,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는 민주주의적 지향을 그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그가 주창한 '재건 시기'의 과업은 분단된 현실 속에서도 한국 문학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내어 후손에게 빚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신설 서울대학교에서 그가 출간한 『국어교육의 당면한 문제』와 『국문학사』는 오늘날 한국 고등교육 내 국어국문학 교육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개인의 학문적 헌신과 서울대학교라는 제도의 결합은 한국인의 정신적 지표를 제시하는 지성의 요람을 만들어낸 결정적 동력이었다.
7. 맺음말: 1946년 8월 22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1946년 8월 22일 탄생한 국립서울대학교의 역사는 갈등과 통합, 시련과 도약이 점철된 78년의 파노라마였다. 식민지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민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려 했던 선배 지식인들의 열망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지적 풍요의 근원이다. 우리는 국대안 파동이라는 뼈아픈 분열을 겪기도 했고, 동숭동의 낭만을 뒤로하고 관악의 거친 흙더미 속에서 새 시대를 열기도 했다.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자명하다. 대학의 진정한 위엄은 거대한 건물이나 행정적 효율성이 아니라,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자치 의지와 사회적 책무를 다하려는 윤리적 태도에서 나온다. 1946년의 설립 정신은 오늘날의 고등교육 혁신 과정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나침반이다. 갈등을 통합의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민족의 특수성을 넘어 보편적 지성을 지향했던 서울대학교의 지난 여정은 미래 100년을 향한 확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지성의 요람으로서 서울대학교가 견지해야 할 본질적 가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는 학문의 진실함과 사회를 향한 헌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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