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00여 년 전 오늘, 시카고의 운명이 결정되다
오늘날 우리 앞에 당당히 솟아 있는 시카고의 마천루와 바둑판처럼 정교하게 짜인 격자형 도로망을 걷다 보면, 이 거대 도시가 애초부터 인간의 치밀한 계획 아래 진공 상태에서 건설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시카고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공간이 아니다. 이 화려한 도시의 아스팔트 아래에는 수천 년간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들의 숨결과, 그들의 영토를 종이 위의 선으로 획정하려 했던 제국주의적 야망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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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5분할 파노라마 사진으로, 노스 애비뉴 비치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1816년 8월 24일은 그러한 역사의 층위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선이 그어진 날이다. 시카고의 지리적·경제적 운명을 결정지은 '세인트루이스 조약(Treaty of St. Louis)'이 체결된 지 오늘로 208년이 되었다. 이 조약은 단순한 토지 거래 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이라는 거대한 두 수계를 잇는 '대륙의 숨통'을 장악하려 했던 미국의 전략적 선택이었으며, 동시에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후손들의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원주민 지도자들의 고통스러운 외교적 결단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시카고의 경계와 교통망의 뿌리가 된 19세기 초, 그 긴박했던 협상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2. 조약의 개요: 1816년 세인트루이스 조약의 팩트체크
1816년 세인트루이스 조약은 미국의 서부 팽창주의가 노골화되던 시기에 체결된 행정적 결과물이다. 당시 조약의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 일시 및 장소: 1816년 8월 24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북쪽의 '포티지 데 슈(Portage des Sioux)'. (조약 공포일은 1816년 12월 30일)
- 미국 측 주요 서명자:
- 니니안 에드워즈(Ninian Edwards): 당시 일리노이 영토 주지사.
- 오거스트 슈토(Auguste Chouteau): 세인트루이스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자 조약 위원.
-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루이지애나 영토 주지사이자 전설적인 탐험가로, 시카고 초기 역사에 깊이 관여한 조지 로저스 클라크의 형제다.
- 원주민 측 참여 부족:
- 세 불의 위원회(Council of Three Fires): 오타와(Ottawa), 오지브웨(Ojibwa), 포타와토미(Potawatomi) 부족 연합.
- 조약의 성격: 1804년 사크(Sauk) 및 폭스(Fox) 부족이 체결했던 불평등한 토지 양도를 다른 부족들로부터 재확인받고, 미시시피강과 오대호를 잇는 운하 및 군사 도로 건설 부지를 확보하는 것.
이 조약이 체결된 '포티지 데 슈'는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당시 영토 분쟁의 핵심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협상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소유권을 둘러싼 처절한 갈등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3. 조약의 배경: 얽히고설킨 토지 소유권과 부족 간의 갈등
세인트루이스 조약의 비극은 18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의 기만적인 외교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사크 및 폭스 부족과 조약을 체결하여 방대한 토지를 양도받았는데, 문제는 그 땅의 실제 거주자인 포타와토미 부족이 이 조약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포타와토미인들은 1815년 '디트로이트 조약' 때가 되어서야 자신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땅이 이미 '서류상'으로는 미국의 소유가 되었음을 깨닫고 경악했다.
분노한 포타와토미 부족은 즉각적인 저항에 나섰다. 1815년과 1816년 초,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침범한 미국의 토지 측량사들을 위협하고 측량 도구를 파괴하며 미국의 행정 절차를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나 미국은 영리했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겨울을 앞두고 물자 부족으로 가장 취약해진 시기를 골라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포타와토미 부족 지도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저항을 계속하다 무력으로 진압당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할 것인가, 아니면 불평등하더라도 조약에 참여하여 실질적인 연금(annuity)을 확보할 것인가. 그들은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이는 사크나 폭스 부족이 자신들의 땅을 판 대가로 보상금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조약은 차가운 종이 위에 쓰였으나, 그 도장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눈물로 찍힌 것이었다.
4. 핵심 인물 탐구: 경계선 위의 외교관, 알렉산더 로빈슨(체체핀퀘)
이 복잡한 외교적 줄타기의 중심에는 알렉산더 로빈슨(Alexander Robinson)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있었다. 원주민 이름 '체체핀퀘(Che-che-pinqua)', 즉 '깜빡이는 눈(Blinking Eye)'으로 불린 그는 경계에 선 인간의 운명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와 오타와 부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다국어 구사 능력을 바탕으로 미국 정부에 의해 부족의 '추장'으로 임명되어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다.
로빈슨은 1812년 포트 디어본 전투 당시 존 킨지(John Kinzie)와 같은 시카고 정착민들을 보호하고 구조한 영웅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는 정착민 사회와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동시에 원주민 사회의 생존권을 방어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일부 동족들은 그가 토지 양도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그를 '변절자'라 비난하기도 했으나, 그는 무의미한 유혈 사태를 피하고 부족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실질적인 보상을 확보하는 것이라 믿었다.
로빈슨의 역사는 박제되지 않았다. 그의 증손녀인 주디스 윙(Judith Wing)과 후손인 벌린 스프리먼(Verlyn Spreeman) 등은 오늘날에도 그의 유산을 지키며 역사의 연속성을 증명하고 있다. 특히 시카고 북서부의 로빈슨 예약 구역(Robinson Woods)은 여전히 그의 가족 묘지가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5. 조약의 핵심 내용: 시카고의 경계선(Indian Boundary Lines) 획정
1816년 조약은 시카고의 물리적 지형을 영구히 바꾸어 놓았다. 미국 정부의 목표는 분명했다. 미시시피강으로 이어지는 수로 시스템의 핵심인 포티지(portage) 지역을 손에 넣어 군사적·상업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조약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지리적 획정 내용이 담겨 있다.
"시카고 크리크(Chicago Creek)가 미시간 호수로 흘러드는 입구에서 북쪽으로 1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시작하여, 시카고 크리크와 일리노이강의 지류인 데스 플레인스(Des Plaines)강 사이의 운하 건설 예정지를 포함하는 폭 20마일의 토지 띠를 양도한다."
이 '20마일 폭의 띠'는 시카고를 동서로 관통하는 전략적 회랑이 되었다. 미국은 그 대가로 12년 동안 매년 1,000달러 상당의 물품을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신의성실의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훗날 미국 정부는 보상금을 일방적으로 절반으로 삭감했고, 현금 대신 가치가 떨어지는 현물로 지급하는 등 불평등한 계약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6. 현대적 유산: 오늘날 우리가 걷고 있는 조약의 흔적
현대 시카고 시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1816년의 조약선을 매일 걷고 있다. 시카고의 도시 설계는 철저한 격자 구조(Grid)를 지향하지만, 이 규칙을 깨고 대각선으로 뻗어 나가는 도로들이 있다. 알버트 샤프(Albert Scharf)가 남긴 지도는 이 대각선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증명한다.
- 로저스 애비뉴(Rogers Avenue): 시카고 북부의 이 대각선 도로는 조약 당시 설정된 북쪽 경계선(Indian Boundary Line)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 포레스트 프리저브 드라이브(Forest Preserve Drive): 이 길은 과거 원주민들이 지형을 따라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이동 경로이자 조약의 경계선이었다.
서구식 문명이 강제한 격자형 질서조차 수천 년간 다져진 원주민들의 삶의 궤적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이 도로들은 시카고라는 도시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원주민의 삶 위에 덧칠된 '역사의 화석'임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7. 역사적 성찰: 불평등한 계약과 생존을 위한 선택
조지 멜빌 스미스(George Melville Smith)의 벽화 '인디언의 토지 양도(Indians Cede the Land)'는 조약 현장을 평화롭고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소스 컨텍스트가 지적하듯, 이는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장면일 뿐이다. 실제 역사는 훨씬 더 차갑고 강압적이었다. 무력 위협과 자원 통제라는 압도적 불균형 속에서 진행된 계약을 '자발적 양도'라 부르는 것은 역사의 왜곡이다.
하지만 우리는 원주민 지도자들을 단순한 희생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후대를 위해 '교육권'과 '수렵·채낙권'을 조약문에 삽입하려 투쟁했다. 이는 주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또한, 이후 전개된 대규모 배수 사업은 367,485에이커에 달하는 습지를 파괴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이는 원주민들이 대지와 맺어왔던 상호 호혜적인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가슴 아픈 기록이다.
8. 맺음말: 시카고라는 이름에 새겨진 원주민의 숨결
'시카고'라는 이름은 원주민 언어 'Zhegagoynak' 등에서 유래했다. 이름부터 도로의 각도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의 모든 근간에는 원주민의 유산이 새겨져 있다. 1816년 8월 24일의 세인트루이스 조약은 누군가에게는 영토 확장의 승전보였겠으나, 대지에 뿌리 내리고 살던 이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외교의 현장이었다.
역사는 박물관 진열장 속에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매일 걷는 로저스 애비뉴의 대각선 속에, 그리고 도시 곳곳에 남은 경계선 속에 역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시카고의 아스팔트 아래에는 여전히 원주민의 지도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선언한다. 오늘 이 도시를 걷는 모든 이가 발밑에 흐르는 깊은 역사의 통로를 기억하기를 바란다. 시카고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원주민들의 역사가 흐르는 살아있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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