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역사가 기억하는 가장 비범한 탄생
1797년 8월 30일, 영국 런던의 지적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문학사의 거대한 흐름을 영원히 바꿀 한 생명이 태어났다. 훗날 인류 최초의 과학 소설(SF)이자 고딕 문학의 정점으로 추앙받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주, 메리 셸리(Mary Shelley)다. 그녀의 탄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근대 문학사와 과학 철학, 그리고 여성 지성사에 있어 거대한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메리 셸리는 열아홉 살이라는 믿기지 않는 나이에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집필하며 당대 남성 중심의 문단과 지식인 사회를 경악게 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작품은 단순한 공포 소설을 넘어 인간 소외, 과학 윤리, 창조주와 피조물의 실존적 고뇌를 다루는 불멸의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삶은 끊임없는 상실과 사회적 배척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이었으나, 메리는 그 고통의 심연에서 펜을 들어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다. 그녀가 세상에 던진 화두는 227년이 흐른 지금도 인공지능과 유전자 조작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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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 칼로프의 프랑켄슈타인 괴물 역할 사진. |
이 비범한 천재의 탄생이 한 시대의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부모 세대로부터 이어진 뿌리 깊은 사상적 혈통이 존재한다.
2. 비범한 가문과 비극적 시작: 고드윈과 울스턴크래프트의 딸
메리 셸리는 태어날 때부터 당대 가장 진보적인 사상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정부주의의 선구자이자 공리주의 철학의 초기 주창자인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이었으며, 어머니는 근대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위대한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였다. 이들은 결혼이라는 가부장적 제도를 거부하고 지적 동반자로서 결합했던,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메리의 삶은 시작부터 죽음의 그림자와 조우해야 했다.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를 출산한 지 불과 11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의학적 무지로 인해 의사가 손을 씻지 않은 채 절개술을 시행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산욕열이 그녀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메리는 평생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대신 어머니가 남긴 저작들을 성경처럼 탐구하며 그 정신을 체화했다. 그녀에게 어머니의 글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증명이자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었다. 어린 시절 메리는 어머니의 묘비 곁에서 책을 읽으며 고독을 달랬고, 그곳에서 죽은 자와 대화하는 법을 익혔다.
네 살 무렵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맞이한 새어머니 메리 제인 클레어몬트와의 갈등은 메리를 더욱 고립시켰다. 새어머니는 메리의 지적 탐구심을 억압하려 했고, 메리는 이에 저항하며 아버지의 서재와 그곳을 방문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대화 속에서 독학으로 지성을 갈고닦았다. 이러한 고립된 환경은 그녀의 상상력을 안으로 침전시켜, 훗날 이름 없는 괴물의 외로움을 묘사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
고독한 천재로 성장하던 메리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며 인생의 격렬한 전환점을 맞이한다.
3. 도피와 방랑: 퍼시 셸리와의 만남과 사회적 배척
1814년, 16세의 메리는 아버지 고드윈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낭만주의 시인이었던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를 만난다. 당시 퍼시는 이미 아내 해리엇이 있는 유부남이었으나, 두 사람은 사회적 금기를 비웃듯 강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런던의 눈총을 피해 유럽 대륙으로의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이 선택의 대가는 혹독했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가로지르는 여정은 낭만적이었을지 모르나, 영국으로 귀환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차가운 사회적 멸시와 끊임없는 채무였다. 무엇보다 메리를 가장 괴롭힌 것은 자식들의 죽음이었다. 1815년 미숙아로 태어난 첫째 딸을 잃은 후, 그녀는 일기에 “죽은 아이를 불가에 두고 문지르면 다시 살아나는 꿈을 꾸었다”라고 적었다. 이 처절한 상실감과 생명 소생에 대한 집착은 훗날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광적인 집착으로 치환되었다.
1816년 말, 퍼시의 전처 해리엇이 자살한 이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대중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메리는 ‘가정 파괴자’라는 낙인 속에서도 자신의 지적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도 그녀의 창작 열정은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1816년 여름, 제네바 호반에서 전설적인 이야기가 탄생한다.
4. 1816년 여름, 제네바호의 밤: ‘프랑켄슈타인’의 서막
1816년은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영향으로 전 세계 기온이 급감한 ‘여름 없는 해’였다. 스위스 레만호 근처의 디오다티 저택(Villa Diodati)은 음산한 먹구름과 그치지 않는 빗줄기에 갇혀 있었다. 이곳에 모인 네 명의 인물—메리, 퍼시, 바이런 경, 그리고 존 폴리도리—은 비를 피해 실내에 머물며 독일 유령 이야기를 읽다 각자 공포 소설을 한 편씩 써보기로 내기한다.
당시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당대 최첨단 과학이던 갈바니즘(Galvanism), 즉 전기를 이용해 사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개념이었다. 메리는 이 기괴한 과학적 화두와 자신의 상실감을 결합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환상 속에서 한 창백한 학생이 자신이 조립한 흉측한 형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엔진이 작동하며 피조물이 기괴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소름 끼치는 이미지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시작이었다.
18세 소녀의 머릿속에서 탄생한 이 구상은 단순한 괴담을 넘어섰다. 그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인간의 오만과, 그 결과로 태어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인문학적 질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은 단순한 공포물을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5. 심층 분석: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담고 있는 철학적 층위
메리 셸리는 작품의 부제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선택하며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행위를 신화적 비극으로 격상시켰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명명한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이는 아버지나 스승을 넘어서는 지식을 습득하고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뜻한다. 빅터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생사를 통제하려는 광기에 휩싸여 사체 더미에서 피조물을 만들어낸다.
- 창조주의 오만과 부권의 상실: 빅터는 창조의 순간까지는 환희를 느끼지만, 막상 눈을 뜬 피조물의 흉측한 외모를 보자마자 공포와 혐오에 휩싸여 그를 버리고 도망친다. 이는 창조주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비겁한 행동이며,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사회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폭력이다. 소설은 이를 통해 가부장적 권위가 책임 없는 권력으로 전락했을 때 발생하는 비극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 소외된 존재의 복수: 이름 없는 ‘괴물’은 선한 본성을 지녔으며, 독학으로 언어와 지식을 습득하고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으며 자신의 처지를 아담과 사탄에 비유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의 외모만을 보고 돌을 던진다. 철저한 소외 속에서 괴물은 창조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이는 지식을 갖춘 약자가 사회적 불의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고발이다.
- 과학 윤리와 카르마: 빅터와 피조물은 결국 증오로 결속된 채 서로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빅터의 아버지가 빅터에게 죽음의 공포를 물려주었듯, 빅터 역시 피조물에게 저주받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이들은 가문의 악업, 즉 카르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북극의 빙벽 위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작품의 성공과는 별개로, 메리 셸리의 개인적 삶은 더욱 깊은 상실의 늪으로 빠져든다.
6. 상실의 무게와 작가로서의 투쟁: 남편의 죽음과 그 이후
메리 셸리의 삶은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잔혹한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퍼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 명의 아이 중 세 명을 잃었다. 1822년에는 남편 퍼시마저 이탈리아 이탈리아 해안(스페치아만)에서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익사하는 참변을 당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된 메리에게 남겨진 것은 넷째 아들 퍼시 플로렌스와 남편이 남긴 막대한 빚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홀로 아들을 키우며 전업 작가로서 생계를 꾸렸다. 그녀는 남편 퍼시 셸리의 유고를 정리하고 편집하여 그의 문학적 명성을 확립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그녀는 중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발퍼가(Valperga)’와 장미 전쟁을 다룬 ‘퍼킨 워벡의 행운(The Fortunes of Perkin Warbeck)’ 등을 발표하며 작가적 스펙트럼을 넓혔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구의 딸’이나 ‘누구의 아내’가 아니었다. 메리는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한계를 뚫고, 자신의 지성으로 삶을 지탱하는 독립적인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7. 유산과 의의: 19세기 여성 작가가 쥐었던 펜의 무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이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대였으나, 가부장적 문학사의 장벽은 여전히 높았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저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당시 문학계를 지배하던 부권 은유를 분석했다. 펜은 남성의 권위를 상징했고, 여성은 남성 작가들이 만든 ‘유리관’ 속에서 천사 아니면 괴물로 박제된 ‘뮤즈’여야만 했다.
- 여왕의 거울을 폭파하다: 메리 셸리는 이러한 남성 중심의 텍스트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녀는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 남성들이 전유하던 ‘지식의 펜’을 휘둘렀다. 그녀의 피조물은 사실 가부장적 사회가 규정한 ‘괴물’의 자리에 서 있던 여성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했다.
- 승리의 춤: 소스 텍스트에서 언급된 것처럼, 메리는 침묵 속에서 추던 ‘죽음의 춤’을 ‘언어를 향한 승리의 춤’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을 계승하여 여성이 단순히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시민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임을 문학으로 증명했다. 메리 셸리의 펜은 가부장제의 낡은 금기를 깨부수는 강력한 도구였다.
1851년 53세의 나이로 뇌종양에 의해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가 남긴 문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8. 결론: 오늘날 우리에게 메리 셸리는 누구인가
메리 셸리의 탄생 227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그녀가 남긴 유산은 더 이상 낡은 책장에 갇혀 있지 않다. 최근 미국 대법원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고, 이란의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 던지며 자유를 외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메리 셸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한 투쟁의 도구다. 그녀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와 운명에 대해 주권을 가져야 함을, 그리고 지식을 가진 자가 겪는 소외와 투쟁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오만과 그가 방치한 피조물의 비극은 현대 인공지능 윤리와 생명 공학의 오만함에 대한 강력한 메타포가 된다. 우리는 메리 셸리를 통해 단순히 ‘괴물 이야기의 작가’가 아닌, 자신의 운명에 맞서 펜을 쥐었던 담대한 선구자를 발견한다. 그녀가 창조한 이름 없는 괴물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면을 비추고 있으며, 그녀가 틔운 지성의 불꽃은 200년 뒤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메리 셸리는 죽음으로 결속된 삶의 비극을 문학적 구원으로 승화시킨, 영원한 문학의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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