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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5일 화요일

[오늘의 역사] 1767년 8월 26일, 칠레 예수회의 강제 추방과 제국의 선택

1. 서론: 제국의 명령과 한 시대의 종언

1767년 8월 26일 새벽, 스페인 제국의 가장 먼 변방 중 하나였던 칠레 왕국(Reino de Chile)에서는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전격적인 군사·행정 작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그해 2월 27일 공포한 '프라그마티카 상시온(Pragmática Sanción)'이 마침내 대서양과 안데스산맥을 넘어 이 땅에 도달한 것이다. 이 명령은 단순히 특정 종교 단체를 추방하는 조치를 넘어, 식민지 사회의 지식 체계와 경제적 혈맥을 장악하고 있던 예수회(Compañía de Jesús)의 모든 영향력을 단번에 거세하려는 제국의 전략적 결단이었다.

카를로스 3세(Carlos III, 1716년 1월 20일 ~ 1788년 12월 14일)

예수회는 당시 칠레에서 가장 정교한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고, 방대한 농장과 상업망을 통해 식민지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왕실의 이번 조치는 교황권과 결탁한 종교 세력을 억누르고 절대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더불어, 예수회가 축적한 막대한 부를 국유화하여 재정 위기를 타개하려는 경제적 목적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였다. 칠레라는 척박한 변방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식민지 사회의 지배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본 글에서는 갑작스러운 왕명에 따른 전격적인 체포 과정과 그 뒤에 숨겨진 치밀한 자산 몰수 및 운용의 메커니즘을 사료를 통해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2. 전격적인 체포 작전: 1767년 8월의 기록과 긴박한 현장

칠레의 총독 안토니오 기이 이 곤자가(Antonio Guill y Gonzaga)가 예수회 추방에 관한 국왕의 '비밀 봉인 명령(pliego reservado)'을 공식적으로 인지하고 개봉한 것은 1767년 8월 7일이었다. 이 명령서에는 극도의 보안 유지와 함께 칠레 내의 모든 예수회원을 동시에 체포하라는 구체적인 지침이 담겨 있었다. 총독은 즉시 군 요원과 행정 관리들을 소집하여 작전을 수립했고, 마침내 8월 26일을 '성 이그나티오의 아들들'이라 불리던 예수회원들을 일제히 체포하는 집행일로 확정했다.

8월 26일 새벽, 산티아고의 콜레히오 막시모(Colegio Máximo)를 비롯하여 칠레 전역의 예수회 거점에 국왕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작전은 전격적이었고 저항의 틈을 주지 않았다. 체포 직후 임명된 위원들(Comisionados)과 왕실 관리들(Oficiales Reales)은 즉각적인 행정 조치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수행된 것은 모든 체포 및 압류 행위에 대한 상세한 서면 기록(auto)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들은 단순히 사람을 가두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회가 소유한 거주지, 학교, 농장(Haciendas)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정밀한 인벤토리(재산 목록화)를 실시했다. 압수 대상에는 금고 안의 현금뿐만 아니라 교회의 화려한 장식물(ornamentos), 성배와 같은 신성한 기물(vasos sagrados), 가구, 그리고 방대한 분량의 도서관 서적과 회계 장부, 상업 기록까지 포함되었다. 이는 성스러운 종교 기물조차 국가의 수익원으로 간주한 철저한 세속적 탄압이었다. 칠레 속령에서만 296명의 예수회원이, 그리고 외딴 섬 지역인 칠로에(Chiloé)에서 14명이 체포되어 페루를 거쳐 스페인으로 향하는 고난의 강제 이송길에 올랐다. 이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방대한 유산은 곧 ‘세속 재산 관리국(Temporalidades)’이라는 거대 국가 기구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3. 몰수된 자산과 경제적 재편: '템포랄리다데스(Temporalidades)'의 운용

왕실은 몰수한 예수회의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세속 재산 관리국(Temporalidades)'을 설립했다. 이 기구의 핵심 임무는 막대한 부동산과 유동 자산을 신속히 수익화하여 예수회원들의 추방 비용과 망명지에서의 연금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총독 기이 이 곤자가는 초기 대응으로서 모든 몰수 부동산을 경매를 통해 민간에 임대(Arrendamiento)하도록 명령했다.

예수회 자산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1767년 10월 1일, 돈 미겔 로사노(Don Miguel Lozano)가 연간 401페소에 '차카라 데 킬리쿠라(Chácara de Quilicura)'를 낙찰받은 것을 시작으로 칠레 전역에서 대대적인 경매가 이어졌다. 주요 부동산과 그 낙찰자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자산 이동의 실상을 알 수 있다.

  • 돈 조셉 알베르토 디아스(Don Joseph Alberto Diaz): 1767년 10월 19일, '모리노 데 라스 칸테라스(Molino de las Canteras)'를 연간 350페소에 낙찰받았다. 여기에는 제분소와 대지, 포도밭 등이 포함되었다.
  • 돈 니콜라스 데 사라테(Don Nicolás de Zárate): 10월 27일, '에스탄시아 데 오코아(Estancia de Ocoa)'를 연간 1,255페소에 확보했다. 그는 50파네가 분량의 백밀(trigo blanco) 수확권과 제분소 운영권을 함께 얻었다.
  • 돈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데 라 바레라(Don Francisco Xavier de la Barrera): 1768년 1월, '에스탄시아 데 카토(Estancia de Cato)'를 연간 550페소에 빌렸으며, 가축 임대료로 137페소 4레알을 추가 지불했다.
  • 돈 아구스틴 프라도(Don Agustín Prado): 1768년 1월 19일, 연간 4,000페소라는 거액에 '에스탄시아 데 론가비(Estancia de Longaví)'를 낙찰받았다. 이곳에는 대규모 가축 떼와 두 개의 제분소, 피혁 공장(curtiduría), 그리고 폴쿠라(Polcura)의 광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관리국은 임차인에게 부동산 가치의 5%를 연간 임대료로 징수했으며, 3년 단위 계약과 가축 보전 등 까다로운 조건을 부과했다. 다음은 당시 집계된 주요 교육기관별 연간 임대 수익 현황이다.

[예수회 자산 연간 임대 수익 현황 (단위: 페소, 레알)]

기관 및 거주지 명칭

연간 수익

Colegio Máximo (산티아고)

16,387.2

Colegio Bucalemu (부칼레무)

8,000

Colegio de la Concepción (콘셉시온)

6,950

Colegio de Mendoza (멘도사)

3,667

Colegio Noviciado (노비시아도)

3,430

Colegio La Serena (라 세레나)

3,000

Colegio San Pablo (산 파블로)

2,971

Residencia de San Fernando (산 페르난도)

2,200

Colegio de Quillota (킬료타)

1,595

기타 거주지 포함 전체 합계

56,099.6

기록에 따르면, 매각된 모든 부동산의 최종 실제 가치는 무려 1,398,515페소 3레알에 달했다. 이 천문학적인 부를 관리하기 위해 왕실은 복식부기 원리를 도입한 세 권의 핵심 장부를 운용했다. 매일의 거래를 기록하는 '리브로 마누알(Libro Manual)', 이를 요약 정리하는 '리브로 마요르(Libro Mayor)', 그리고 현금 유출입을 관리하는 '리브로 데 카사(Libro de Caxa)'가 그것이다. 이러한 체계적인 회계 관리는 국가가 종교 자산을 얼마나 치밀하고 효율적으로 약탈하고 재배분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4. 잊힌 존재들: 노예 노동력의 처분과 인적 손실의 비극

예수회 자산 몰수의 가장 어두운 단면은 그들이 소유했던 1,190명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의 운명이었다. 국가 권력은 인간인 그들을 '인벤토리'의 한 항목으로 취급하여 가혹하게 처분했다. 1768년 1월 16일의 국왕 결의에 따라 산티아고에서는 대대적인 노예 경매가 시작되었다.

[예수회 소유 노예 처분 통계 (인원수 기준)]

구분

남성(H)

여성(M)

합계

산티아고 경매 매각(Rematados)

283

327

609

리마(Lima)로 압송

108

116

224

부에노스아이레스(B. Aires)로 압송

58

69

127

농장 잔류 및 행방 불명 등

123

107

230

전체 총계

572

618

1,190

경매 과정은 잔인할 정도로 효율적이었다. 관리들은 노예들을 연령과 성별에 따라 분류하여 가격을 매겼다. 집행 첫해인 1768년에만 397명의 노예가 78,295페소에 팔려 나갔다. 특히 부칼레무(Bucalemu) 농장에서만 193명의 노예가 매각 대상이 되었으며, 그 가치는 37,060페소로 평가되었다. 일부 노예들은 스스로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기도 했다. 부칼레무의 노예 4명은 625페소를 지불하고 해방(manumisión)되었으며, 콜레히오 막시모의 노예 1명은 225페소에 자신의 자유를 샀다.

또한, 왕실은 칠레보다 노예 가격이 높았던 리마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351명의 노예를 강제 압송했다. 이 과정에서 돈 로케 코레아(Don Roque Correa)나 돈 세바스티안 소테데스(Don Sebastián Sotedes) 같은 업자들이 노예들을 대량으로 낙찰받아 리마로 재판매하려다 당국의 제지를 받는 등 인간 시장의 추악한 이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러한 인적 자원의 강제 해체는 식민지 노동 시장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으며, 수많은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든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5. 망명지에서 피어난 지성: 펠리페 고메스 데 비다우레(Felipe Gómez de Vidaurre)

강제 추방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예수회 지식인들은 망명지에서 조국 칠레의 정체성과 미래를 설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펠리페 고메스 데 비다우레다. 그는 이탈리아 망명 생활 중 칠레의 크리올(Criollo) 청년들을 위한 혁신적인 교육 프로젝트인 '미국인 아버지와 아들들의 대화(Conversaciones de un padre americano con sus hijos)'를 저술했다.

이 저작은 단순한 신학 서적이 아니었다. 비다우레는 물리, 식물학, 농업 기술을 망라한 '과학 교육'을 제안하며, 이것이 식민지적 한계를 극복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특히 칠레의 독특한 자연환경에 맞춘 '과학적 농업'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근대적 실험과 관찰을 통해 생산성을 높일 것을 주장했다. 제국에 의해 버림받은 지식인이 오히려 조국의 근대적 발전을 고민했다는 이 역설적인 사실은, 탄압이 지식의 흐름까지는 막을 수 없었음을 증명한다. 그의 기록은 훗날 남미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귀중한 지적 밑거름이 되었다.

6. 역설적 결과: 수백 년을 이어온 교육과 경제의 유산

1767년의 추방령은 단기적으로 예수회라는 조직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이 남긴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씨앗은 수 세기 동안 살아남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UBC)의 펠리페 발렌시아 카이세도(Felipe Valencia Caicedo) 교수의 연구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과거 예수회 미션이 활발했던 지역은 추방으로부터 2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주변 지역보다 교육 및 경제 수준이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예수회 미션 지역의 장기적 경제 영향력 분석]

지표 구분

주변 지역 대비 격차

역사적 원인 분석

교육 수준

10~15% 높음

읽기, 쓰기 및 고등 교육 기반의 전승

소득 수준

10% 높음

숙련된 노동력 확보 및 가구 소득 증대

산업 구조

제조·서비스업 비중 높음

전파된 수공예 및 기술적 숙련도의 장기 지속

연구에 따르면, 예수회가 전수한 문해력과 기술적 숙련도는 단순히 당대의 성과에 그치지 않고 가계를 통해 세대 간 전승되었다. 이로 인해 해당 지역 주민들은 현대적인 산업화와 서비스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타 지역보다 훨씬 높은 적응력을 보였다. 1767년의 탄압이 조직을 와해시켰을지언정, 교육을 통해 사람의 몸과 정신에 새겨진 유산은 제국의 어떠한 명령으로도 지울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반전이다.

7. 결론: 8월 26일이 남긴 교훈

1767년 8월 26일의 사건은 국가 권력이 단기적인 재정 확보와 권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종교와 교육, 그리고 인간의 권리를 얼마나 잔인하게 유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스페인 왕실은 치밀한 회계 장부와 경매 시스템을 통해 예수회의 부를 강탈했고, 수많은 노예를 물건처럼 팔아치웠다. 그러나 그들이 거둔 139만 페소의 수익보다 더 강력했던 것은 추방된 자들이 남긴 지식의 기록과 현지에 뿌리내린 교육의 힘이었다.

역사는 승리한 권력자의 기록이 아니라, 탄압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도도히 흐르는 유산의 기록이다. 8월 26일, 비록 칠레에서 예수회의 물리적 존재는 사라졌으나 그들이 심어놓은 인적 자본의 가치는 250년 뒤의 경제적 수치로 부활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진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권력의 서명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가는 교육과 지식이 만드는 장기적인 '사람의 힘'임을 이 사건은 엄중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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