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의 역사에 대한 상식이 지식이 되는 순간... 알아두면 돈이 되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부동산 · 금융 · 법률 · IT] 핵심 상식 가이드. 세상의 흐름을 읽는 역사적 지식부터 자산과 내 몸을 지키는 필수 생활 상식까지 한눈에 정돈해 드립니다.

Breaking

2026년 8월 24일 월요일

[오늘의 역사] 1442년 8월 25일, 조선의 시선으로 고려 500년을 기록하다: 《고려사》 편찬의 대장정

1. 서론: 1442년 8월 25일의 역사적 이정표와 사라진 기록의 흔적

1442년 8월 25일(세종 24년), 조선의 도성에서는 전 왕조의 역사를 집대성한 《고려사 전문》이 신개와 권제에 의해 국왕에게 바쳐졌다. 조선 건국 이후 약 50여 년간 지속된 '고려사 정리 프로젝트'가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다.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전 왕조의 역사를 찬술하는 행위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새 왕조가 하늘의 뜻을 이어받았다는 '천명(天命)'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고려 500년은 조선의 건국 정당성을 입증할 거울인 동시에,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 될 실패의 반면교사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시기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지적 호기심이다. 최근 《승정원일기》의 기록 분석을 통해, 현존하는 《고려사》에는 누락된 '단군편'이 초기 판본인 《고려사 전문》 혹은 그 이전의 초고본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조선 초기의 사관들이 고려의 뿌리를 고대사까지 확장하여 인식하려 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1442년의 성과는 찬란한 완성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편찬 책임자 권제가 자신의 가문을 미화하기 위해 조상의 기록을 조작했다는 '사료 조작 스캔들'이 터지면서 반포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역사 기록의 객관성에 대한 조선 사관들의 엄격한 잣대를 보여주었으며, 이후 문종 대에 이르러 체제와 내용을 완전히 일신한 기전체(紀傳體) 《고려사》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려사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2. 60년의 고뇌: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는가?

조선 건국 직후인 태조 대부터 문종 대까지 고려사 편찬은 5대 왕에 걸쳐 약 60년이 소요되었다. 이 대장정이 이토록 길어진 본질적인 이유는 '역사를 누구의 시선으로 기록할 것인가'를 둘러싼 왕권과 신권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에 있었다.

태조 대의 《고려국사》는 정도전과 정총의 주도로 단 1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는 정도전을 필두로 한 신진사대부가 조선의 설계자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 체제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계파의 주관적 서술'이라 규정하며 강력히 부정했다. 국왕의 권위보다 신하의 활동을 부각한 서술 방식이 왕권 중심의 국가를 꿈꾼 태종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륜과 변계량에게 맡겨진 개정 작업은 하륜의 사망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세종 대에 이르러서야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다'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 아래 대대적인 재편찬이 이루어졌다.

편찬 단계별 주요 인물 및 특징

단계

주요 인물

서술 방식

권 수

특징 및 의미

태조 (1395)

정도전, 정총

편년체

37권

《고려국사》. 신권 중심의 서술로 건국 정당성 급조

태종 (1414~1416)

하륜, 변계량

편년체 개수

-

정도전 서술 부정 및 왕권 강화 반영 시도 (중단)

세종 (1424)

유관, 윤회

편년체

-

《수교고려사》. '직서(直敍)' 원칙 최초 적용 시작

세종 (1442)

신개, 권제

편년체

-

《고려사 전문》. 사료 보충했으나 권제의 조작 사건 발생

문종 (1451)

김종서, 정인지

기전체

139권

현존 《고려사》. 목록 2권 포함. 체제와 내용의 완결판

이 과정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왕조의 기틀이 잡혀감에 따라 '정치적 선전'에서 '객관적 기록'으로 사학의 패러다임이 진화해온 과정이었다.

3. '이실직서(以實直書)'와 '명분론'의 격돌: 유관과 변계량의 대립

세종대왕이 강조한 이실직서(以實直書)는 조선 초기 사학 정신의 정수였다. 하지만 이는 유교적 '명분론'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사대부들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논쟁의 핵심은 고려 왕실이 대내적으로 사용한 '참의지사(僭擬之事, 분수에 넘치는 명칭)'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있었다.

고려는 황제국을 표방하며 국왕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했고, 왕의 사후에는 '종(宗)'이라는 묘호를 붙였으며, 왕위를 이을 아들을 '태자(太子)'라 불렀다. 이에 대해 변계량은 "고려는 제후국이었으므로 유교 예법에 어긋나는 용어들을 조선의 격에 맞게 '개서(改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태자'를 '세자'로, '종'을 '왕'으로 고쳐 써서 사대주의적 명분을 세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반면 유관은 강력히 반발했다. "역사는 당대의 사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비록 예법에 어긋났을지라도 당시 그렇게 불렸던 사실 자체를 지우는 것은 후대를 속이는 일이다." 세종은 고심 끝에 유관의 손을 들어주었다. 세종은 고려의 기록들이 이미 '왕'으로 개서된 부분은 어쩔 수 없으나, 당시의 독자적인 천하관이 담긴 표현들은 그대로 두게 했다. 이러한 세종의 결단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고려가 원 간섭기 이전까지 황제국 체제를 유지했음을 보여주는 '대사천하(大赦天下)'와 같은 용어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려사》가 단순한 선전 도구가 아닌, 1차 사료로서의 독보적 가치를 획득하게 된 결정적 장면이었다.

4. 기전체(紀傳體)로의 전환: 위계와 질서의 재정립

세종 31년(1449), 역사 서술 체제는 연대순인 편년체에서 항목별 구성인 기전체(紀傳體)로 전격 전환되었다. 이는 고려의 역사를 조선이 지향하는 유교적 위계 질서 속에 편입시키려는 고도의 구조적 전략이었다. 당시 사관들은 "고려의 사적이 소략하여 체례가 부족함(體例闕略)"을 우려했으나, 김종서와 정인지 등은 기전체만이 지닌 권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사》의 4대 구성 요소는 총 139권(목록 2권 포함)으로 이루어지며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 세가(世家) 46권: 황제의 기록인 '본기(本紀)' 대신 제후의 기록인 '세가' 명칭을 사용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의식한 조치였으나, 내용은 고려 왕들의 독자적인 통치 행위를 사실적으로 담아 실질적인 본기의 기능을 수행하게 했다.
  • 지(志) 39권: 천문, 역법, 오행, 지리, 예법 등 고려 사회를 지탱한 제도 문물을 집대성했다. 이는 고려라는 국가가 지녔던 문화적 역량을 증명하는 자료다.
  • 연표(年表) 2권: 중국 및 주변국과의 연대를 대조하여 고려사의 흐름을 동아시아 전체 지형 속에서 조망하게 한다.
  • 열전(列傳) 50권: 총 1,008명의 인물을 13개 항목(후비, 종실, 제신, 충의, 효우, 열녀, 방기, 환자, 혹리, 폐행, 간신, 반역 등)으로 분류하여 서술했다. 이는 《고려사》 전체 분량 중 가장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인물의 시비와 득실을 가리는 도덕적 잣대로 작용했다.

5. 열전(列傳)의 비밀: '폐가립진(廢假立眞)'과 정통성의 단절

《고려사》 열전은 단순한 인물 사전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정치적 장치였다. 가장 극적인 지점은 고려의 마지막 왕들이었던 우왕과 창왕의 배치다.

조선 사관들은 이들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으로 규정하는 '폐가립진(廢假立眞,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를 내세웠다. 이에 따라 세가에 있어야 할 우왕과 창왕은 열전의 맨 끝인 '반역전(叛逆傳)'에 배치되었다. 이는 마지막 폭군들을 왕의 계보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고려 왕조의 정통성이 이미 끊겼음을 선언하고, 조선 건국을 '찬탈'이 아닌 '정상화'의 과정으로 미화하는 정치적 거세였다.

열전의 서술 방식 역시 이러한 명분을 뒷받침한다. 홍유가 태조 왕건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며 "포악한 왕(궁예)을 내몰고 현명한 왕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대의"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훗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묘하게 겹쳐진다. 또한 원나라의 간섭기 속에서도 고려의 독자성을 지키려 했던 이제현의 활동과 '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를 원의 행성으로 만들려던 시도)'을 막아낸 논리를 상세히 기록했다. 이는 조선이 계승한 고려라는 나라가 결코 타국에 흡수될 수 없는 '독자적 왕조'였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런 나라를 망친 이인임 등 '간신전' 인물들과 조준, 정도전 등 조선 건국에 참여한 '제신전' 인물들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조선 건국의 필연성을 극대화했다.

6. 결론: 오늘날 우리가 《고려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1442년의 미완성본과 조작 스캔들을 넘어 1451년(문종 원년) 최종 완성된 《고려사》 139권은 한국 중세사 연구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비록 조선의 안경으로 걸러진 기록일지라도, 그 안에는 사라진 고려라는 왕조의 실체를 보존하려 했던 조선 초기 사관들의 치열한 노력이 서려 있다.

세종의 '이실직서' 원칙은 정치적 프로파간다 속에서도 역사의 원형을 보존해냈다. 만약 당시 사관들이 명분론에만 매몰되어 모든 용어를 개서했다면, 우리는 고려가 황제국을 자처하며 드높은 기상을 떨쳤던 사실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의도에 의해 재구성되지만, 진실에 육박하려는 엄격한 원칙이 있다면 그 기록은 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얻는다. 1442년 8월 25일의 고뇌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현재의 역사를 얼마나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는가. 《고려사》는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시대를 비추는 가장 정교하고도 아픈 거울로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