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가(悲歌) ‘황성옛터’: 금지된 울림과 예술혼의 기록
1. 서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국민들의 아픔과 설움을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넣었던 대중가요들은 단순한 유행가를 넘어선 의미를 지녔다. 그중에서도 1928년 발표된 ‘황성옛터’는 한국인이 작사와 작곡을 모두 하여 발표한 최초의 대중가요 중 하나로, 식민지 조선인들의 애끓는 심정을 대변하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 노래는 민족혼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검열과 탄압 속에서 금지곡의 낙인이 찍히는 비극을 맞았다. 이 글에서는 ‘황성옛터’의 탄생 배경과 작곡가 전수린, 작사가 왕평의 각별한 인연, 그리고 일제에 의해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과정과 그 음악이 남긴 깊은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2. ‘황성옛터’의 탄생: 예술가의 시대적 소명
‘황성옛터’는 영천 출신의 시인 왕평(王平, 본명 이응호)이 노랫말을 짓고, 개성 출신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이 곡을 붙여 배우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애잔하게 부른 노래이다. 1920년대 후반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으며, 국내에는 3.1운동 이후의 침체와 더불어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중을 위로하려는 소명을 느끼고 있었다.
왕평과 전수린 역시 그러한 시대적 소명 속에서 이 노래를 창작하였다. 바이올린 연주가이자 작곡가였던 전수린은 1928년 여름, 악극단의 지방 순회공연 중 개성 부근 배천을 방문했다. 당시 만월대 등 고려의 옛터가 황폐하게 변한 모습을 보며 깊은 감회에 젖었고, 이를 계기로 고국의 멸망과 망국의 설움을 노래할 영감을 얻게 된다. 그는 왕평에게 이 감상을 이야기했고, 왕평은 이에 공감하며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처럼 작곡가와 작사가의 깊은 교감과 시대적 아픔에 대한 공감대가 이 명곡 탄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3. 민족의 가슴을 울린 노래: 초기의 폭발적 인기
‘황성옛터’는 발표되자마자 조선인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노래의 가사는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 황량한 바람이 스쳐가고 / 정막한 밤하늘엔 쓸쓸한 달만”과 같이, 망국의 한과 비애를 담고 있었으며, 이는 조국을 잃은 조선인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애조 띤 멜로디와 이애리수의 애절한 목소리는 슬픔을 더욱 극대화시켰다.
이 노래는 조선인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으며, 당시 유행하던 유성기 음반으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길거리의 카페에서부터 시장,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황성옛터’는 곳곳에서 들려오는 민족의 비가(悲歌)가 되었다. 이 노래는 단순한 오락거리가 아니라, 고달픈 식민지 생활 속에서 민중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민족의식을 잊지 않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황성옛터’의 인기를 주목하며, 그 노래가 민족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평가하였다.
4. 일제의 시선: 금지곡 지정의 구체적인 과정과 이유
‘황성옛터’의 폭발적인 인기는 일제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일제 통치 당국은 노래가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이것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하며 항일 감정을 고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노래 제목에 등장하는 ‘황성(荒城)’이라는 단어는 일제의 검열 대상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 ‘황성(荒城)’이 ‘황폐한 성’이라는 문자적 의미 외에 ‘황성(皇城)’, 즉 ‘고려의 옛 수도인 개성을 의미하며, 나아가 망한 조선의 임금이 살던 궁궐’을 연상시킨다고 해석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옛 왕조, 특히 고려나 조선을 회고하고 그리워하는 정서 자체가 현 체제에 대한 불만과 반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황성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 중 하나가 되었다.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 의심의 시작: 노래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자, 일제 헌병대는 노래 가사에 대한 본격적인 검열을 시작한다. 특히 “황성옛터”가 “고려의 옛 터”를 넘어 “일제가 점령한 조선 왕실의 황폐한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 강제적인 해석 유도: 헌병대는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을 체포하여 고초를 겪게 하며, 노래의 의미에 대해 심문하였다. 이 과정에서 작가들은 “황성”이 ‘황폐한 성(荒城)’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을 의미할 뿐, 다른 정치적인 의도는 없다고 항변하였다.
- 음반 및 공연 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황성옛터’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자극한다고 판단, 공식적으로 음반 판매 및 공연을 금지시켰다. 이 조치로 인해 노래는 대중 앞에서 불릴 수 없게 되었고, 음반 유통 또한 불법이 되었다.
- 예술가들의 고초: 금지곡 지정을 주도했던 일제 헌병대는 왕평과 전수린을 체포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고 협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상당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는 일제가 문화 예술 분야까지 철저히 통제하고 민족 정신을 억압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강압적인 조치는 ‘황성옛터’가 지닌 상징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지하에서, 혹은 조용히 불려 지며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5.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의 각별한 인연
‘황성옛터’의 성공과 그로 인한 고초는 작사가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의 예술적, 인간적 인연을 더욱 각별하게 만들었다.
- 공동의 예술적 비전: 왕평(본명 이응호)은 단순한 작사가를 넘어 시인, 극작가, 영화감독 등으로 활동하며 당시 조선의 문화 예술계를 이끌었던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다. 전수린은 서양 음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악극단 활동을 통해 대중과 호흡하며 새로운 한국 대중음악의 지평을 연 선구적인 작곡가였다. 이들은 서로의 예술적 재능과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자 하는 열정에 깊이 공감하며 여러 작품에서 협업하였다. ‘황성옛터’는 그들의 예술적 교감이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 금지곡으로 인한 동고동락: ‘황성옛터’가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일제의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왕평과 전수린은 함께 체포되어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예술적 창작이 통제당하고 그로 인해 직접적인 탄압을 받는 경험은 두 사람의 인연을 단순한 협업 관계를 넘어선 동지애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민족의 아픔을 노래했고, 그로 인해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초석: ‘황성옛터’는 한국인이 직접 만든 노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후대에 이어질 한국 대중음악 발전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왕평과 전수린은 이 노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의 초기 형태를 정립하고, 민족 정서가 담긴 고유한 음악 양식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인연은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들의 각별한 인연은 단순히 동료를 넘어선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민족의 고난 속에서 예술을 통해 저항하고자 했던 시대적 동지로서 빛나는 유산을 남겼다.
6. ‘황성옛터’가 남긴 유산: 끝나지 않는 울림
‘황성옛터’는 일제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국민들의 애창곡으로 남아있었다. 이는 이 노래가 지닌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비단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의 혼란과 분단,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의 향수와 고뇌를 대변하는 노래로 계속해서 불렸다.
- 민족의 한(恨)을 담은 상징: ‘황성옛터’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인 ‘한’을 가장 잘 표현한 노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에 대한 향수는 시대를 초월하여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 저항 정신의 상징: 금지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사이에서 계속 불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 노래가 단순한 슬픔을 넘어선 저항 정신의 상징임을 보여준다. 노래를 부르는 행위 자체가 일제 통치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이자 민족 정체성을 확인하는 행위가 되었다.
-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황성옛터’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 노래는 이후에 나올 수많은 애국가요와 민족적 정서가 담긴 노래들의 토대가 되었으며,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7. 결론: 역사의 증언이 된 노래
‘황성옛터’는 작곡가 전수린과 작사가 왕평의 각별한 인연과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 속에서 탄생했다.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와 검열 속에서 금지곡의 비극을 맞았지만, 그 울림은 오히려 더욱 커져 민족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이 노래는 단순히 일제에 의해 금지된 곡이라는 사실을 넘어,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에 민족의 희로애락을 담아냈던 예술혼과 민중의 저항 정신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이다.
오늘날 ‘황성옛터’는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자유와 민족 자존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이 노래가 전하는 애잔한 멜로디와 가사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으며, 예술의 힘이 어떻게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는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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