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5일 목요일

1905년 - 멕시코 이민

1905년 멕시코 이민

 
멕시코 이민은 1905년 단 한차례만 진행된 불법적인 단기 계약 노동 이민이었다. 북아메리카로의 이민은 190212월 제물포항을 출발한 미국 하와이로의 노동 이민이 그 시초였다. 하와이 이민이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멕시코 이민은 마이어스(John G. Meyers)라는 이민브로커가 진행한 것이었다.
 
마이어스는 멕시코 유카탄 에네껜 농장주협회 대리인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처음에는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 이민자를 모집하려고 했지만 멕시코 이민의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 와중에 일본의 이민 회사인 대륙 식민 회사와 결탁하여 한국에서 노동 이민자를 모집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048월 한국에 들어온 마이어스는 전국의 주요 항구 도시에 이민모집사무소를 개설하였으며 황성신문에 대대적인 이민 모집 광고를 냈다. 노동 이민자 모집은 순조로웠는데 황성신문에 실린 허위 과장 광고와 하와이 이민의 성공 소식 등이 멕시코 이민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05년은 러일 전쟁으로 사회 분위기가 좋지 못했고, 가뭄 등으로 한국인의 경제적 궁핍이 심했던 시기였다.
 
모집된 인원은 약 1,000여 명으로 가족 중심의 이민자들이었다. 계약 기간은 1905년부터 1909년까지 4년이었다. 한인 이민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유카탄 주의 주도 메리다(Mérida)였으며,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5월경 멕시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한인 이민자들은 20여 개의 에네껜 농장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모집 당시의 광고와 다르게 한인 이민자들은 살인적인 무더위와 노예 수준의 노동 조건 아래서 혹사당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멕시코와 어떠한 외교적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여서 멕시코 이민자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였다. 이들은 계약 기간 동안 각 농장에 고립되었으며, 1909년 계약 기간이 종료된 후에도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자립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1909년 계약 종료 이후 대부분 농장을 나왔지만, 한인들은 당시 멕시코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유카탄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려고 하였다. 더욱이 1910년부터 내란이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일어났으므로 한인들은 더 이상 멕시코에 사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다만 다른 지역으로 함께 이주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였기에 자본을 모으려고 회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19106월 경에 멕시코 한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회사가 설립되었는데, 감독은 정춘식, 서기는 김기창, 재무는 신광희 등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간부들이 맡았다.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리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는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로 집단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191117일에열린 대의원회에서 멕시코 재류동포 구제안을 통과시킨 뒤, 멕시코에 견묵위원(遣墨委員)으로 파견하였던 황사용(黃思溶)을 미국의 여러 곳에 보내어 멕시코 한인의 실상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는 멕시코 한인을 구제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는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주협회와 함께 멕시코 한인 이민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여 허락을 받고는 미국 연방정부에 멕시코 한인의 입국 허가를 신청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멕시코 한인들을 한번에 1백명씩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후원 고본금(股本金) 15600원을 발행하였다. 한편 멕시코의 메리다지방회(Mérida地方會)는 이근영(李根永)을 총대로 선임하여 김동현, 김명수, 이병언 등과 함께 하와이로 보내고자 하였다. 19119월에 이들은 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항을 떠나 만사니요(Manzanillo)항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919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미국 이민조례에 위반이 되어 하와이로 가지 못하고 다시 멕시코로 돌아왔다. 또한 미주 한인들은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를 위해서 공채를 발행하여 19121월에 7천 여원의 공채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한인의 하와이 이주 계획이 실행되지 못하면서 이러한 자금은 되돌려 주었다.
 
메리다의 한인회는 유카탄 지방의 한인 모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국민회의 메리다 지부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한인회는 강제 병합 이후 독립 자금을 지원하고, 군사 훈련을 가르치는 숭무 학교(崇武學校)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벌였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한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고, 1921년 메리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쿠바로 이주하면서 메리다 한인회의 활동도 쇠퇴하였다.
 
[참조] 우리역사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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