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성자,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별세
1. 서론: 크리스마스에 하늘로 돌아간 우리 시대의 성자
1995년 12월 25일 새벽,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던 날, 한국 의료계의 거성이자 소외된 이들의 영원한 친구였던 장기려(張起呂, 1911년 8월 14일 ~ 1995년 12월 25일) 박사가 향년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단순한 의사를 넘어 평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한 ‘바보 의사’였으며, 한국 현대사에서 인술(仁術)의 진정한 의미를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오늘날에도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며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2. 인술의 시작: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는 사람들을 위해"
장기려 박사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성 의학 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그는 부와 명예를 보장받는 길 대신, 의과대학 입학 시험 당시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약속을 평생의 이정표로 삼았다. 그것은 "의사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던 백인제 박사의 제자로 수련하며 실력을 쌓았고,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이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청년 의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 전쟁의 비극과 부산에서의 새로운 출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평양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는 차남만을 데리고 월남하게 된다. 남겨진 가족과의 이별은 그에게 평생의 슬픔이었으나, 그는 그 아픔을 승화시켜 부산의 피란민들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1951년, 그는 영도구의 한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설립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피란민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그가 치료비가 없는 환자에게 뒷문을 열어주며 "밤에 몰래 도망가시오"라고 속삭였다는 일화는 그가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다.
4. 한국 의학사의 쾌거: 국내 최초 간 대량 절제술 성공
장기려 박사는 인품뿐만 아니라 실력에서도 당대 최고였다. 1959년 10월 20일, 그는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하며 한국 간 외과 분야의 개척자가 되었다.
당시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간을 절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으나, 그는 치밀한 연구와 과감한 집도를 통해 한국 의학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대한의학협회 학술상 등을 수상하며 외과 전문의로서의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했다.
5. 복지 국가의 초석: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설립
그의 가장 위대한 사회적 업적 중 하나는 1968년 설립한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이다. 이는 국가 주도의 건강보험 제도가 시행되기 훨씬 전의 일로, 한국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조직이었다.
"건강할 때 이웃을 돕고, 병들었을 때 도움을 받자"라는 슬로건 아래 시작된 이 운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했다. 영세민들을 위한 이 혁신적인 제도는 훗날 대한민국의 국가 의료보험 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인 모델이 되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라몬 마그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6. 무소유의 삶: 집 한 채 없이 떠난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병원 옥상의 20여 평 남짓한 사택에서 머물렀다. 그는 병원 원장이자 대학교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명의로 된 집이나 재산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사후에 그가 남긴 유품은 낡은 의사 가운과 지인들이 선물한 안경, 그리고 가족의 사진이 전부였다.
그는 월급의 대부분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내놓았으며, 자신을 위한 사치는 철저히 경계했다.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의 지조 또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통일 후에 아내를 만날 것을 기약하며 재혼 권유를 모두 거절했고, 결국 하늘나라에서 재회하기를 꿈꾸며 눈을 감았다.
7. 교육자로서의 헌신과 학문적 열정
그는 진료뿐만 아니라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부산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수많은 외과 의사를 길러냈다. 그는 제자들에게 기술적인 완벽함보다 환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먼저 가르쳤다.
또한 그는 '한국 간 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는 등 의학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 성과와 인간 존중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의료 윤리의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8. 결론: 장기려 박사가 남긴 진정한 유산
1995년 성탄절, 그는 평생을 닮고자 했던 예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 박사가 남긴 유산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나 거대한 재산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 낮은 곳을 향하는 헌신, 그리고 의사로서의 정직한 사명감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인지를 묻는다. 매년 12월 25일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사랑의 빛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예우'조차 사양했던 그의 겸손함과 인술의 정신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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