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11일】 팔레스타인 독립의 상징 야세르 아라파트 영면
2004년 11월 11일은 중동 역사, 특히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있어 슬픔과 상실의 날로 기억된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의장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초대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가 75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의 페르시 군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40년 이상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며, 때로는 게릴라 지도자로, 때로는 평화 협상의 주역으로 국제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40일간 애도 기간 선포로 이어졌으며, 3일간 기업과 상점, 일주일간 공공기관이 문을 닫는 등,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지도자를 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라파트는 그 누구보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 민족의 분리 저항 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거성이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투쟁의 시작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8월 24일 카이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무함마드 압드 아르-라만 압드 아르-라울프 아라파트 알-쿠두와 알-후세이니(Muhammad Abd al-Rahman Abd al-Ra'ouf Arafat al-Qudwa al-Husseini)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에 깊이 심취하였다. 1944년 카이로 대학(킹 푸아드 1세 대학 전신) 토목과에 입학한 그는 시오니스트들의 저서를 탐독하고 유대인들과 토론하며 아랍 민족주의적 사고를 굳건히 하였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발발 시, 대학을 떠나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하고 이집트군과 함께 가자 전투에 참여하는 등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다.
1950년대 후반, 쿠웨이트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그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동료들과 함께 1959년 '파타(FaTaH)'당을 창설하였다. 파타당은 팔레스타인 국가 해방 운동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의 앞글자를 거꾸로 읽은 것이지만, '정복', '개방'을 뜻하는 'Fatah'라는 아랍어 단어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파타는 다른 팔레스타인 단체들과 달리 사상과 재정 면에서 주변 아랍 국가들의 독립성을 추구하였다. 쿠웨이트, 카타르 등지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부호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활동을 이어갔다.
1964년 아랍 연맹의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가 창설된 후, 파타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아라파트는 1969년 PLO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망 시까지 PLO 의장직을 유지하며,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PLO는 무장 투쟁을 통해 이스라엘과 국제사회에 팔레스타인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와 같은 과격 단체의 활동으로 인해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평화와 투쟁 사이의 역동적인 리더십
야세르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무장 투쟁과 외교적 협상을 오가는 역동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1970년대까지 PLO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을 주된 방식으로 삼았으며, 아라파트는 여러 차례 이스라엘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1974년에는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한 손에는 올리브 가지를, 다른 손에는 자유 전사의 총을 들고 왔다"며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의지를 밝히면서도 무장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988년 PLO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유엔 결의 242호를 수용하며,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아라파트의 역사적인 결정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외교적 전환은 1990년대 초 이스라엘과의 비밀 협상을 가능하게 하였다. 마침내 1993년 9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1922~1995) 이스라엘 총리와 역사적인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을 체결하고 백악관 잔디밭에서 악수를 나누었다. 이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설립이 합의되었고, 아라파트는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 일부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1994년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Shimon Peres, 1923~2016)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6년 베냐민 네타냐후(Benjamin Netanyahu, 1949~)가 이스라엘 총리로 선출된 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는 다시 적대적으로 변해갔다.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1998년 빌 클린턴(Bill Clinton, 1946~)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와이리버 각서(Wye River Memorandum)'가 체결되었으나, 이 또한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2000년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중동 평화 회담은 결국 결렬되었고, 제2차 인티파다(Intifada)가 발발하면서 아라파트는 라말라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 갇히는 상황에 처했다.
마지막 투쟁과 영면
2000년대 초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라말라에 있는 자치정부 청사(무카타)에 사실상 연금되었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2004년 10월 말, 그는 심각한 복통과 혈액 질환으로 프랑스 페르시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 세계는 그의 건강 상태에 촉각을 세웠으며, 그의 죽음이 중동 정세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였다.
수 주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라파트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2004년 11월 11일 새벽 3시 30분(현지 시각), 그는 치료를 받던 중 영면에 들었다. 그의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독살설 등 다양한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의 시신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라말라의 무카타 내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앞으로의 민족 운동 방향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독립과 존엄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영웅이자 전사로 기억된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는 테러를 옹호하고 평화의 기회를 저버린 강경파 지도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그의 삶은 팔레스타인의 현대사이자 중동 평화 노력의 축소판이었다. 그의 사망 이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 1935~)로 교체되었으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다. 아라파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심어준 국가 건설의 꿈과 독립 투쟁의 정신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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