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1월 7일】 러시아 11월 혁명(10월 혁명) 시작되다
1. 혁명의 서막 : 제정 러시아의 몰락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 러시아 제국은 오랜 기간 동안 전제 군주정 하에 놓여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러시아는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나, 농노 해방 이후에도 농민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였고, 급속한 산업화는 도시 노동자 계급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차르 니콜라이 2세(Nicholas II, 1868~1918)의 통치는 무능하고 부패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05년 러일 전쟁에서의 패배와 ‘피의 일요일’ 사건은 차르 체제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극대화하였다. 이후 두마(국가 의회)가 설치되었으나,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였고, 러시아는 전쟁 초기부터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물자 부족, 인플레이션, 식량난 등이 심화되면서 민중의 고통은 극에 달하였다. 전쟁은 제정 러시아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사회 전반에 걸친 불만은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군대 내부에서도 사기 저하와 함께 반전 감정이 확산되고 있었다.
2. 2월 혁명과 이중 권력의 시대
1917년 3월 8일(율리우스력 2월 23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와 파업이 시작되었고, 이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확산되었다. 군대마저 시위대에 합류하자 차르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율리우스력 3월 2일) 퇴위하였다. 이로써 300년 넘게 이어져 온 로마노프 왕조의 전제 군주정이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를 2월 혁명이라 부른다.
차르 체제가 무너진 후, 러시아는 임시정부와 노동자 및 병사 대표 소비에트(평의회)라는 '이중 권력' 체제에 놓이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이 주도하였고, 입헌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반면 소비에트는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요구(토지 개혁, 전쟁 중단)를 표명하였다. 임시정부는 연합국과의 약속을 이유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고, 이는 민중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이 시기 러시아는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는 시위와 파업, 그리고 군대 내 동요를 겪고 있었다.
3. 볼셰비키와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의 등장
2월 혁명 이후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년 4월 22일 ~ 1924년 1월 21일)은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4월 테제’를 통해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제국주의 전쟁 중단, 토지 국유화, 생산 수단 사회화를 외치며 볼셰비키(Bolsheviks) 당을 이끌었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달리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급진적 세력이었다.
레닌의 강력한 지도력과 “평화, 토지, 빵”,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는 슬로건은 전쟁과 기근에 지친 노동자, 농민, 병사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볼셰비키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며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특히 7월에 발생한 볼셰비키 주도의 시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레닌은 다시 잠적해야 했으나, 8월에 발생한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시도가 임시정부에 의해 저지되면서 볼셰비키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이는 임시정부의 무능함과 함께 볼셰비키가 대중의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4. 11월 혁명(10월 혁명)의 발발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중순, 무장봉기를 결정하고 레프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1월 6일(율리우스력 10월 24일) 밤부터 11월 7일(율리우스력 10월 25일) 새벽까지, 볼셰비키의 적위대와 병사들은 페트로그라드의 주요 통신 시설, 철도역, 은행 등을 장악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은 11월 7일 밤(율리우스력 10월 25일 밤)이었다. 볼셰비키 세력은 페트로그라드에 위치한 겨울궁전(Winter Palace), 즉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점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임시정부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동시에 열린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을 선포하였고, 레닌은 인민위원평의회 의장으로서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발표하였다. 이 혁명은 다른 혁명들에 비해 비교적 적은 유혈 사태 속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5. 혁명의 파급 효과와 새로운 세계의 탄생
러시아 11월 혁명은 국내외적으로 막대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 볼셰비키 정부는 즉각적으로 평화, 토지, 민족 자결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들과의 교섭을 시작하여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며 전쟁에서 이탈하였다. 또한 토지 사유제를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하였으며, 공장의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반대 세력과의 갈등은 길고 참혹한 러시아 내전(1918-1922)으로 이어졌다.
국제적으로는 이 혁명이 전 세계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는 냉전 시대를 초래한 동서 진영 대결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자캅카스 연방을 포함한 여러 공화국들이 통합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수립하였고, 이는 20세기 국제 질서의 주요 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6. 11월 혁명(10월 혁명)의 역사적 평가와 논쟁
1917년 11월 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일부에서는 이를 착취와 불평등에 시달리던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숭고한 시도로 평가한다. 특히 제정 러시아의 봉건적 잔재와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11월 혁명이 볼셰비키당이라는 소수 엘리트에 의한 쿠데타적 성격이 강하며, 이후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의 전체주의 독재를 초래하고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민주주의적 절차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파를 탄압하며 초래된 비극적 결과들을 지적한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내에서는 혁명의 주역인 레닌과 볼셰비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혁명이 현대 러시아의 정체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성찰이 계속되고 있다. 11월 혁명은 20세기의 이념 대결을 촉발하고 전 세계를 냉전의 시대로 이끌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국가와 사회에 깊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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